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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6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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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무서운 경고를 던지십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잘 알며, 겉보기에는 가장 완벽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들아!” 하고 꾸짖으시며 아주 날카로운 비유를 드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신의와 자비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마태 23,23).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마태 23,24)라고 덧붙이십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의 유머가 섞인 아주 강렬한 비유입니다. 포도주를 마실 때 아주 작은 곤충인 하루살이가 들어가면 율법상 부정한 음식이 되기에 정성껏 걸러 내면서도, 정작 율법에서 금지한 가장 거대한 부정한 동물인 낙타는 통째로 삼켜버린다는 뜻입니다. 곧,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규칙에는 목숨을 걸면서, 정작 신앙의 핵심인 사랑과 자비는 통째로 잃어버린 그들의 영적 시각장애를 고발하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우리 신앙의 ‘겉’과 ‘속’이 어떻게 일치해야 하는지, 그리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끝까지 붙잡아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유혹이나 잘못된 소문에 흔들리지 말라고 권고하며,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2테살 2,15)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은 낡은 관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어져 온 복음의 본질, 곧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입니다. 이 본질을 굳게 쥘 때 우리의 마음은 굳건해지고, 온갖 선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향신료의 잎사귀 개수까지 세어가며 십일조를 바치는 등 종교적 의무에는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이웃을 향한 ‘의로움과 신의와 자비’가 빠져 있었...

[묵상] 2026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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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의 주춧돌이 된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필립보의 인도를 따라 찾아온 한 사람을 바라보시며,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극찬을 건네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요한 1,47). 이 칭찬의 주인공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화려한 겉모습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 내면에 깃든 ‘진실함’을 알아보셨습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겉치레와 편견을 벗겨내고 하느님 앞에 오롯이 마주 서는 영혼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참여하게 되는지 보여줍니다. 제1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거룩한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평범했던 사도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천상 성전을 떠받치는 가장 견고하고 영광스러운 주춧돌이 된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초석 중 하나가 된 바르톨로메오의 첫 부르심 이야기가 오늘 복음에 펼쳐집니다. 처음에 그는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이었습니다. 필립보가 나자렛 출신의 예수를 만났다고 하자,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 1,46) 하며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그는 "와서 보시오"라는 친구의 말에 직접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솔직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를 보시며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고 하셨고, 깜짝 놀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이 한마디에 그의 편견은 눈 녹듯 사라지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터뜨리게 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무화과나무 아래’는 단순히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아니라, 경건한...

[묵상] 2026년 8월 22일 복된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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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천상의 모후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복된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화려한 왕관을 쓰고 높은 보좌 위에서 군림하지만, 하늘나라의 여왕이신 성모님이 쓰신 왕관은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겸손’과 ‘순종’으로 엮어진 왕관입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겉만 화려하고 속은 비어버린 인간의 위선을 경고하며, 오직 낮고 순수한 마음에만 하느님의 거룩한 영광이 깃든다는 영적 진리를 선포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라는 철저한 고독과 성전 파괴의 아픔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대한 희망의 환시를 전합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을 때 떠나갔던 하느님의 영광이 다시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자, 하느님께서는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 (에제 43,7)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돌아오신 이 성전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인간적인 교만의 성벽을 완전히 허물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 ‘거룩한 빈자리’였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성전의 실체가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영광이 온전히 머무시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마주하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성전이 아니라 ‘인간의 성벽’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귀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마태 23,3)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묵직한 율법의 짐을 남의 어깨에는 얹어 놓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러야 할 성전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높이 올려두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즐겼습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을 향해 엄중히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2).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마태 23,8)...

[묵상] 2026년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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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목자이신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입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하겠다"는 신념으로 교회를 이끄셨던 성인은 특히 어린이들이 일찍 첫영체를 모실 수 있도록 배려하며, 모든 신자가 성체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도록 이끄신 ‘성체의 교황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당시 유다인들은 수백 개가 넘는 복잡한 규정들에 얽매여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관통하는 가장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7.39).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영적으로 죽어 마른 뼈처럼 황량해진 우리 삶을 다시 살려내는 유일한 에너지가 바로 ‘사랑’임을 선포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장엄한 환시를 목격합니다. 주님의 영이 이끄신 골짜기에는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을 전하시자 뼈들이 맞춰지고 살이 오르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하느님의 ‘숨’(생기)이 들어가자 그들이 살아나 엄청난 군대를 이룹니다. 하느님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다” (에제 37,14). 이 마른 뼈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하느님의 숨결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사랑의 계명’입니다. 율법 조항에만 갇혀 하느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마른 뼈’처럼 굳어 있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오직 사랑만이 인간을 살리는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두 계명이 동등하게 중요하며,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

[묵상] 2026년 8월 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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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2세기 교회의 위대한 영적 스승이자,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수많은 영혼을 인도하셨던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흥겨운 ‘임금의 혼인 잔치’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마련해 두시고 기쁜 얼굴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마태 22,4).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완고함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 마음’을 불어넣으시며 당신의 기쁨 속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집요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유배 생활로 영적 황폐함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놀라운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을 배신하여 주님의 이름을 더럽혔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깨끗이 씻어주시고 결정적인 은총을 약속하십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 36,26).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참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새 마음과 새 영’의 상태가 바로 복음에서 요구되는 ‘혼인 예복’과 연결됩니다.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밭으로 가고 어떤 이는 장사하러 가버렸으며, 심지어 임금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물질적 욕심과 무관심이 하느님의 호의를 짓밟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임금은 고을 어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잔치에 초대하여 잔칫방을 가득 채웁니다.  하지만 예복을 입지 않고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한 임금은 그를 어둠 속으로 내던지라고 명령하며 엄숙하게 선언하십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14). 임금이 예복을 요구한 것은 가난을 따지기 위함이 아...

[묵상] 2026년 9월 17일 연중 제2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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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큰 은혜나 용서를 받았을 때,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하며 올라오는 뜨거운 감사와 사랑을 느껴본 적이 있으신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한 고을의 죄인인 여인이 예수님의 발치에 엎드려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으며 향유를 바르는 매우 강렬하고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합니다. 세상의 시선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파격적인 행동 뒤에는, 바로 '무조건적인 용서와 하느님 자비에 대한 깊은 체험'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자신이 전한 복음의 핵심,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합니다. 사도는 과거에 교회를 박해했던 자신의 어두운 과거를 숨기지 않고 겸손히 고백합니다. 자신은 사도라 불릴 자격조차 없는 가장 보잘것없는 자이지만, 하느님의 자비가 자신을 바꾸어 놓았음을 선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은총으로 지금의 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은 헛되지 않았습니다” ( 1코린 15,10). 한편,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 시몬은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지만, 그를 향한 참된 존경과 사랑의 표현은 건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인인 여인이 다가와 눈물과 향유로 예수님의 발을 모실 때, 마음속으로 예수님과 여인을 단죄하고 심판하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의 오만한 속셈을 아시고 두 채무자의 비유를 들려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루카 7,47.50).  사도 바오로가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깨닫고 오직 '하느님의 은총'으로 사도의 소명을 다했듯, 복음 속 여인 역시 자신의 큰 죄를 용서해 주시는 예수님의 무한한 자비를 깨달았기에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 신앙생활의 자리가 어디에 놓여 있는지 가슴 깊이 되묻게 합니다.  바리사이 시몬의 자리는  율법을 잘 지...

[묵상] 2026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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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은연중에 ‘세상의 계산법’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한 만큼 받아야 하고, 투자한 만큼 거두어야 한다"는 논리는 공정해 보이지만,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팍팍하게 만들고 타인을 시기하게 합니다. 열심히 사는데도 나보다 늦게 시작한 이가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 마음속에는 억울함과 불만이 피어오르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뙤약볕 아래서 땀 흘린 일꾼들과, 마칠 때가 다 되어 겨우 한 시간 일한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값을 건넵니다. 그리고 이에 불평하는 이들을 향해, 우리 신앙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 20,15). 이 비유는 인간의 이기적인 계산법을 넘어, 소외되고 뒤처진 이들을 끝까지 찾아내어 똑같은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자비를 선포합니다.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 이들은 게을러서 논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용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 20,7)라는 그들의 대답처럼, 주인은 그들의 노동 시간이 아니라 그들이 오늘 밤 가족에게 가져가야 할 양식을 걱정했기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베푼 것입니다.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은 주인의 처사에 분통이 터졌지만, 그들은 치명적인 진실 하나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침 일찍 주인에게 간택되어 온종일 굶주릴 걱정 없이 안전한 포도원 안에서 일할 수 있었던 ‘선택의 은총’입니다. 반면 오후 다섯 시에 온 이들은 온종일 극심한 불안과 절망 속에서 장터를 헤매던 이들이었습니다. 주인의 한 데나리온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그 절망을 채워주는 ‘자비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침 일찍 온 일꾼의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내가 봉사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라며 공로를 내세우고, 뒤늦게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을 시샘합니다. 그러...

[묵상] 2026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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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우 당혹스러우면서도 강력한 비유를 던지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많은 재물 때문에 슬퍼하며 떠나간 부자 청년의 뒷모습을 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 19,24).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아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며 술렁였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손에 쥐어진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지 일깨우시며, 구원의 참된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내 힘과 소유를 의지하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전적인 신뢰’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티로의 군주를 꾸짖으십니다. 티로는 당시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던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풍요에 취한 군주는 마음이 교만해져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에제 28,2). 하느님은 그를 향해 “너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그가 의지하던 재물과 지혜가 침략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질지 경고하십니다. 재물이 주는 풍요가 인간을 스스로 신의 자리에 앉히는 무서운 ‘교만’을 낳은 것입니다. 티로 군주의 교만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부자의 위험성’과 일맥상통합니다. 여기서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재산, 지식, 경험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하느님 없이도 내 힘으로 완벽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영적 부자’를 의미합니다. 낙타가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듯이, 자신의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린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

[묵상] 2026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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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한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많은 재산과 젊음,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모두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계명을 철저히 지켜온 성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 완벽해 보이는 젊은이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마태 19,16.20). 이 질문은 당당해 보이지만, 사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불안이 숨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신앙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르는 결단의 말씀을 통해 그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무거운 영적 과제를 던져줍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명령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눈의 즐거움이었던 아내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거두어가시며,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고 묵묵히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닥쳐올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비극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함을 보여주는 ‘예표’였습니다. 에제키엘은 자신의 가장 큰 인간적 슬픔마저 하느님의 표징을 위해 제단에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이 아픈 내려놓음의 신비는 오늘 복음 의 젊은이에게도 요구됩니다. 계명을 다 지켰다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완전함’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예수님은 지금 그가 목숨처럼 의지하던 ‘재물’이라는 안전지대에서 걸어 나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에제키엘이 아내에 대한 슬픔을 내려놓았듯, 이 젊은이 역시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결말은 안...

[묵상] 2026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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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가장 무더운 8월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오늘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기쁨이자 희망의 축일인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유난히 뜨거운 올여름의 열기 속에서,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지고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에게 하늘로 부름받으신 성모님의 따뜻한 위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오늘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향해 외친 이 한마디는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울리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 이가 맞이하게 될 최종적인 승리와 영광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제1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의 환시를 보여줍니다. 이 여인은 메시아를 탄생시키지만, 그 아기를 삼키려는 거대한 용의 위협을 피해 광야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이는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며 심장이 꿰찔리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성모님의 삶을 상징함과 동시에, 세상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척박한 광야에서 여인을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승리의 근거를 명확히 제시합니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고,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이 구원의 약속이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성모 승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구원의 신비를 찬미하는 위대한 노래, ‘마니피캇’(Magnificat)을 부르십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비천함을 돌보시어 큰일을 행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올리시는 하느님의 반전(反轉)을 선포하십니다. 이 찬가의 고백대로 지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겸손한 종으로 사셨던 성모님은...

[묵상] 2026년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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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으신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순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인께서는 어둠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미움은 파괴하지만, 사랑만이 창조합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이기심과 분열로 멍든 우리 시대를 향해,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법’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깨어지기 쉬운 인간의 약속과 이를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배신을 아프게 지적하십니다. 비천하던 시절 하느님의 과분한 사랑으로 왕비처럼 고귀해졌음에도, 이스라엘은 제 아름다움에 취해 하느님을 배신했습니다. 인간적인 계약대로라면 당장 파기되어 마땅한 배신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허물보다 컸습니다.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에제 16,60).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당신의 자비로 완전히 덮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다시 부끄럽게 만들고 진정한 회개로 이끄십니다. 이 영원한 사랑의 성격은 복음에서 예수님의 ‘혼인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혼인이 인간의 편의나 조건에 따라 맺고 끊는 계약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짝지어 주신 신성한 신비임을 일깨우십니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주님께서 말씀하신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은 단순히 부부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 영혼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이웃과 맺는 사랑의 본질을 꿰뚫는 영적 통찰입니다. 세상은 철저히 조건에 따라 움직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곁에 두고, 손해가 되거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쉽게 갈라섭니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조건...

[묵상] 2026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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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혹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동안 가장 하기 힘든 숙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용서’입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주고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을 용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려 해도 막상 그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금 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안고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태 18,21).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완고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비로 걸어 나오는 삶’이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대낮에 이삿짐을 꾸리고 밤에는 벽을 뚫고 길을 떠나는 기이한 행동을 명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보지도 않는 ‘반항아들의 집안’인 이스라엘이 완고함 때문에 결국 바빌론 유배라는 비극적인 짐을 짊어지게 될 것임을 온몸으로 예고한 것입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닫아거는 완고함은 결국 스스로를 고통의 유배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완고함의 사슬을 끊어내는 하늘나라의 방식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선포로 드러납니다. 당시 유다 사회의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제시하며 스스로 대견해했을 베드로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이는 용서에 숫자의 제한을 두지 말고, 끝없이 무한하게 자비를 베풀라는 명령입니다. 이어지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만 탈렌트’의 빚을 단번에 탕감받고도, 정작 자신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종은 결국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께 받은 자비의 크기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도저히 갚을 수 없...

[묵상] 2026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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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가장 힘겨운 숙제는 무엇일까요? 경제적 어려움이나 건강 문제도 크지만, 결국 우리를 가장 깊이 아프게 하고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가정과 직장, 심지어 성당 공동체 안에서조차 우리는 서로 오해하고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마음이 틀어지면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고통이 되고, 결국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 온 공동체의 평화는 깨어지고 맙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죄로 인해 깨어진 거룩함의 위기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영적 책임감’이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가슴 아픈 환시를 목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와 불의가 극에 달하자, 마침내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셔야 할 거룩한 성전이 죄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 때문에 "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 (에제 9,4)의 이마에 표징을 찍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공동체의 죄악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을 통해, 하느님은 다시 자비의 손길을 펴십니다. 죄로 얼룩진 공동체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선포됩니다. 주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뒷공론을 하거나 소문을 내는 대신, 단계별로 실천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첫째는 ‘가서 단둘이 만나 그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이 절차의 핵심은 상대를 단죄하여 쫓아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그 영혼을 부끄럽지 않게 보호하고 회복시켜 ‘형제를 얻기 위함’(마태 18,15 참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마태 18,19).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복음의 말씀과는 반대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당사...

[묵상] 2026년 8월 11일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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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 속에서도 각자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늘을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가 함께하기를 빕니다. 우리는 흔히 ‘어른’이 된다는 것을 책임감을 갖추고 세상 이치를 깨닫는 긍정적인 과정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치열하게 어른으로 살다 보면 어느새 남과 비교하며 서열을 따지게 되고, 영혼의 기쁨은 메말라가기 마련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세상의 무게에 짓눌린 우리를 향해 하늘나라의 새로운 법칙을 선언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마태 18,3). 제자들은 여전히 세상 방식대로 누가 가장 큰 사람인지 서열을 따지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스스로 낮추어 어린이처럼 되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라고 가르치십니다. 주님은 이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 중 하나라도 잃는 것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아님을 강조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순수한 마음’이라는 주제로 연결됩니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고통과 재앙이 적힌 두루마리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쓰디쓴 고통처럼 보였지만, 그가 순종하여 입에 넣었을 때 그것은 “꿀처럼 입에 달았다” (에제 3,3)고 고백합니다. 내 고집을 내려놓고 하느님 말씀을 온전히 받아들일 때, 십자가의 사명조차 달콤한 은총으로 변한다는 신비를 보여줍니다. 계산하고 거부하는 어른과 달리, 어린이는 아버지가 주시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꿀처럼 달게 받아먹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어린이’가 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느님께 의지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온전히 자신을 맡깁니다. 반면 어른은 내 힘으로 능력을 증명하려 애쓰다 보니,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 앞에서 쉽게 절망합니다. 참된 신앙인은 자신이 하느님 없이는 살 수 없는 ‘길 잃은 양’임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내 영적 가난함을 깨닫고 아버지의 바짓가랑이...

[묵상] 2026년 8월 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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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뜨거운 태양이 대지를 달구는 오늘, 우리는 교회의 위대한 부제이자 순교자이신 성 라우렌시오 축일을 맞이합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흐르는 이 무더위처럼, 우리의 일상 역시 숨이 턱턱 막히는 고단함으로 가득할 때가 많습니다. 가족을 위한 끊임없는 희생, 직장에서의 인내, 내 권리를 양보해야 하는 억울한 순간들을 마주하다 보면, 우리 마음속에는 “왜 나만 이렇게 손해 보고 살아야 하나?” 하는 지친 탄식이 피어오르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단한 희생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에게, 참된 생명과 풍요로움으로 나아가는 하늘나라의 역설적인 법칙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 이 비유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세상을 살리는 풍성한 열매가 될 것임을 예고합니다. 밀알이 껍질을 깨고 땅속에서 녹아 없어질 때 비로소 수많은 이삭이 돋아나듯,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십자가 위에서 내어주심으로써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려는 우리에게도 세상적인 목숨에 연연하지 말고 십자가의 길을 함께 걷자고 초대하십니다. 이 내어줌의 신비는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을 통해 더욱 구체화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2코린 9,6)라고 말하며, 하느님께서는 억지로가 아니라 ‘기쁘게 베풀어 주는 이’를 사랑하신다고 강조합니다. 우리가 이웃을 위해 내어놓는 작은 정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더 큰 씨앗과 빵으로 자라나게 하시는 은총의 통로가 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움켜쥐고 쌓아 올리는 삶을 성공이라 여깁니다. 그래서 나를 낮추고 고집을 꺾어야 하는 ‘죽음’의 순간을 마주하면 두려워하며 회피하려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밀알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더 큰 생명으로 나아가기...

[묵상] 2026년 8월 8일 성 도미니코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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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이성으로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모순과 고통을 마주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 왜 선한 이들이 고통받고 악한 이들이 번성합니까?", "제 간절한 기도는 왜 이토록 오랫동안 침묵 속에 묻혀 있습니까?" 하는 깊은 탄식이 우리 안에서 터져 나옵니다. 삶의 풍랑 속에서 하느님마저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 우리 영혼은 깊은 갈증과 무기력함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바로 그런 영적 어둠과 한계 상황 속에서 부르짖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신비로운 시간표를 신뢰하는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강력하게 일깨워 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하바쿡 예언서와 복음은 ‘절망적인 현실’과 ‘믿음의 권능’이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바쿡 예언자는 유다 사회의 불의와 잔인한 바빌론의 횡포를 보며 하느님께 대담한 질문을 던집니다. “ 어찌하여 배신자들을 바라보고만 계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이를 집어삼켜도 잠자코 계십니까? ” (하바 1,13). 그러나 예언자는 불평에만 머물지 않고, 하느님의 답변을 듣기 위해 파수꾼처럼 초소 위에 서서 묵묵히 기다립니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파멸의 환시가 늦어지는 것 같더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응답하시며 위대한 말씀을 남기십니다.  “ 보라, 뻔뻔스러운 자를. 그의 정신은 바르지 않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 (하바 2,4). 여기서 ‘성실함’이란 하느님을 향한 꺾이지 않는 ‘신뢰와 믿음’을 뜻합니다. 이 기다림과 신뢰의 신비는 복음에서 제자들의 무기력을 꾸짖으시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제자들이 고치지 못한 간질 앓는 아이를 예수님께서는 마귀를 쫓아내어 깨끗이 고쳐주셨습니다. 나중에 제자들이 따로 찾아와 자신들은 왜 마귀를 쫓아내지 못했는지 묻자, 주님은 단호하게 답하십니다. “너희의 믿음이 약한 탓이다” (마태 17,20). 그러고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다면 산더미 같은 문제 앞에서도...

[묵상] 2026년 8월 7일 연중 제18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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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한여름의 태양이 내리쬐는 8월의 첫 주간을 마무리하는 금요일입니다. 무더위 속에서 일상을 꾸려가다 보면 몸의 피로와 함께 마음의 무게도 부쩍 무겁게 느껴지곤 합니다. 먹고사는 문제,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가족 간의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 등 저마다의 어깨에 놓인 삶의 무게가 때로는 숨을 턱턱 막히게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고단한 발걸음으로 당신을 찾아온 우리에게 신앙의 핵심이자, 참된 자유로 나아가는 지름길을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태 16,24). 오늘 제1독서인 나훔서와 복음은 ‘세상 중심적인 삶의 허무함’과 ‘하느님 중심적인 십자가 삶의 영원함’을 극적으로 대비시킵니다. 나훔 예언자는 폭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던 아시리아의 수도 니네베를 향해 하느님의 준엄한 심판을 선포합니다. 그들이 쌓아 올린 부와 권력은 ‘피의 도성’ 위에 세워진 신기루일 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교만을 꺾으시고 흩어졌던 당신 백성에게는 "평화를 알리는 이의 발이 산을 넘어온다” 며 해방의 기쁜 소식을 전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을 배제한 채 쌓아 올린 세상의 화려함은 결국 먼지처럼 사라진다는 역사적 진실을 말해줍니다. 이 진리는 오늘 복음에서 더욱 명확해집니다. 주님은 스승의 수난을 가로막으려던 베드로를 꾸짖으신 후, 제자들에게 진짜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마태 16,26). 니네베처럼 온 세상을 손에 쥐려 허덕이는 삶은 결국 영원한 생명을 잃어버리는 가장 어리석은 선택입니다. 오히려 주님을 위해 이기심과 탐욕을 기쁘게 비우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곤 합니다. 신앙생활이 나를 억누르고 고통을 참아내야만 하는 억울한 일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자신을 버림’은 존재의 파괴가 아니라, 내 삶의 ...

[묵상] 2026년 8월 6일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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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절정에 달한 8월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변모 축일’을 맞이합니다. 반복되는 일상과 경제적 불안, 사그라지지 않는 가족 간의 갈등으로 우리 마음이 짙은 안개 속에 갇힌 듯 답답할 때, 주님께서는 우리를 ‘높은 산’으로 따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슬픔도 집어삼키지 못할 하느님의 눈부신 영광을 우리에게 펼쳐 보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구약의 오랜 기다림이 예수 그리스도의 빛나는 현존 안에서 어떻게 완성되는지 웅장하게 보여줍니다. 다니엘 예언자는 환시를 통해 ‘연로하신 분’의 어좌와 구름을 타고 나타나 영원한 통치권을 받는 ‘사람 아들 같은 이’를 보았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악을 이기고 승리할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예고하는 장면입니다. 이 신비로운 천상의 영광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의 모습 위로 찬란하게 구현됩니다. 제자들 앞에서 변모하신 주님에 대해 성경은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그분의 옷은 빛처럼 하얘졌다” (마태 17,2)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영광스러운 사건이 일어난 ‘시점’입니다.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가 부활하셔야 한다는 ‘첫 번째 수난 예고’를 하셨습니다. 스승의 죽음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절망하던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앞으로 마주할 십자가의 참혹함에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부활과 승리의 영광’을 미리 맛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눈부신 광경에 도취된 베드로는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 (마태 17,4)라고 외칩니다. 우리 역시 은혜를 체험할 때면 시끄러운 세상 밖을 피해 그 순간에만 안주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구름 속에서 들려온 하느님의 목소리는 제자들의 영적 단잠을 깨우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마태 17...

[묵상] 2026년 8월 5일 연중 제18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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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더운 8월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습니다. 숨이 턱턱 막히는 더위 속에서 우리의 몸도 지치지만, 가정의 불화나 자녀 걱정,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경제적 형편 같은 삶의 무게로 인해 우리 영혼은 더 깊은 갈증과 피로를 느낄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하느님께 간절히 소리쳐 기도해도 그분은 너무나 멀리 계신 것 같고, 내 삶은 마치 외딴섬처럼 고립되어 있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외로움과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주님은 단 한 순간도 우리를 잊으신 적이 없으며, 제1독서의 말씀처럼 “나는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예레 31,3)라고 우리 영혼에 다정하게 속삭이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구원에는 경계가 없으며, 그분의 사랑은 우리의 좁은 선입견보다 훨씬 더 넓고 깊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이방 민족들에게 짓밟히고 흩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의 눈물겨운 귀환 약속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비록 죄를 짓고 멀리 도망쳤을지라도, 당신의 자비로 다시 불러 모으시어 축제의 춤을 추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은 특정 민족만의 하느님이 아니라, 상처받은 모든 이를 품으시는 진정한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이 보편적인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한 이방인 여인, 곧 가나안 여인의 절박한 청원을 통해 극적으로 드러납니다. 마귀가 들어 비참하게 고통받는 딸을 살리기 위해 여인은 예수님을 찾아와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낯설고 차갑기만 합니다. 처음에는 한마디 대답도 없는 침묵으로 일관하시더니, 급기야 도와달라고 애원하는 여인에게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모욕적인 말씀까지 하십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이 이방인을 멸시할 때 쓰던 매우 거친 비유였습니다. 주님께서 왜 이토록 잔인할 정도로 여인을 외면하셨을까요? 그것은 결코 차별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여인의 마음속에 ...

[묵상] 2026년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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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8월의 첫 주간입니다. 치열한 일상 속에서 뜻대로 풀리지 않는 관계나 마음의 짐 때문에 우리 영혼이 헐떡일 때가 참 많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상처 입은 우리 영혼을 향해 따뜻한 회복의 음성을 들려주시는 동시에, 참된 영적 건강을 위해 마음의 어디를 청소해야 하는지 자비로운 진단을 내려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외적인 형식을 넘어선 ‘내면의 온전한 회복’이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유다 백성들은 죄악으로 인해 나라가 망하고 유배를 떠나는, 인간의 힘으로는 고칠 수 없는 절망적인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해 눈물겨운 사랑의 선언을 건네십니다. “ 참으로 내가 너에게 건강을 되돌려주고 너의 상처를 고쳐 주리라 ” (예레 30,17). 하느님은 우리를 파멸시키시는 분이 아니라, 영혼의 가장 깊은 곳까지 싸매어 당신의 소중한 자녀로 되돌려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치유의 하느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외적인 규칙에만 매몰되어 영혼이 시들어가는 이들을 꾸짖으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제자들이 음식을 먹기 전 손을 씻지 않았다는 점을 문제 삼으며 예수님을 공격했지만, 그들은 조상의 전통이라는 형식을 하느님의 계명보다 위에 두는 우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명확한 진리를 선포하십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않는다.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마태 15,11). 손을 씻지 않는 것은 몸의 위생 문제일 뿐, 영혼을 더럽히지는 못합니다. 정작 우리를 더럽히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걸러지지 않고 터져 나오는 악한 생각, 시기, 질투, 비난과 같은 ‘마음의 독소’들입니다. 우리는 종종 외적으로 드러나는 신앙의 형태에만 온 신경을 쓰곤 합니다. 주일 미사 참례나 헌금, 봉사 직분 같은 외적 형식도 중요하지만, 우리의 내면은 어떠한지 돌아봐야 합니다. 성당 문을 나서자마자 이웃을 시기하고 가족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쏟아낸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아파하...

[묵상] 2026년 9월 4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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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며 얼마나 자주 남들의 평가나 시선에 마음을 빼앗기곤 합니까?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과연 인정받고 있을까?" 하는 생각은 우리를 늘 불안하게 하고, 스스로 만들어 놓은 낡은 틀에 갇히게 만듭니다.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오로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과 타인의 평가로부터 자유로워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워지는 영적 기쁨의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자신의 사도직을 단호하면서도 겸손하게 고백합니다.  “ 내가 여러분에게 심판을 받든지 세상 법정에서 심판을 받든지,  나에게는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도 나 자신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압니다.  그렇다고 내가 무죄 선고를 받았다는 말은 아닙니다 ” (1코린 4,3-4).  바오로 사도는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판, 심지어 자기 자신의 주관적인 자만이나 자책에 휘둘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마음의 비밀을 밝히시고 모든 것을 드러내실 주님의 심판만을 바라보았기에 참된 영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요한의 제자들이나 자신들과 달리 단식을 하지 않고 먹고 마신다며 시비를 걸어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 (루카 5,34)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형식이라는 낡은 옷을 벗어버리고, 하느님 나라라는 새 포도주를 담기 위해 오셨습니다. 은총과 기쁨의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지금이야말로 참된 축제의 시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선언하십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루카 5,38) .  낡은 가죽 부대 는 굳어버린 우리 마음의 틀입니다. 율법주의적이고 타성을 좇는 태도, 남을 판단하고 잣대를 대는 마음,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다"며 변화를 거부하는 집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