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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026의 게시물 표시

[묵상] 2026년 9월 1일 연중 제2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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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세상의 지혜를 넘어선 전혀 다른 차원의 지혜, 곧 성령께서 주시는 하느님의 지혜 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 있는 말씀 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 영적인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받지 않습니다 ” (1코린 2,15).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깊은 비밀을 깨닫게 해주는 분은 오직 성령 이시라고 강조합니다. 인간의 영에 속한 일을 그 사람 자신 말고는 아무도 모르듯, 하느님의 일도 하느님의 영이 아니면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오신 영을 받았기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을 깨닫는 은총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말씀 한마디로 더러운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분의 말씀에 권위가 있었기 때문이다” (루카 4,32).  세상의 학자들이나 인간적인 지식인들과 달리, 예수님의 말씀에는 사람들의 영혼을 치유하고 어둠을 몰아내는 권능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이게 대체 어떤 말씀인가?” 하는 놀라움을 불러일으킨 그 권위는 바로 하느님의 영, 곧 성령  안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의 권위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람을 '현세적 인간'과 '영적인 인간'으로 구분합니다.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직 눈에 보이는 이익, 세상의 논리, 계산적인 마음으로만 세상을 바라보기에 성령의 일들을 어리석은 것으로 여깁니다. 반면,  영적인 인간은  하느님의 영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눈앞의 손익을 넘어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며, 그리스도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회당에서 소리치던 더러운 마귀의 영이 들린 사람은 예수님의 거룩함을 알아보았지만,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배척하려 했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영을 지니지 못한 현세적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러...

[묵상] 2026년 8월 3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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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웠던 8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달 동안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애쓰신 여러분 모두에게,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라는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나신 고향 나자렛의 회당으로 가십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펴서 당신의 사명을 가장 잘 드러내는 구절을 선포하십니다.  “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루카 4,18-19). 선포를 마치신 예수님께서는 숨을 죽이고 당신을 주목하는 이들을 향해 놀라운 한마디를 덧붙이십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루카 4,21). 주님은 8월의 마지막 날을 맞이하는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먼 미래의 막연한 약속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 삶 한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생생한 신비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가 화려한 능력이나 말재주가 아니라, 오직 성령의 힘과 말씀의 현존을 통해 실현된다고 가르칩니다. 복음 속 나자렛 사람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은총 가득한 말씀에 감탄하지만, 이내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며 예수님을 얕잡아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견과 스펙의 틀에 갇혀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결국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몰아내려 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판단이 신앙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던 이가 바로 사도 바오로입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던 코린토 신자들에게 갈 때, 뛰어난 지혜를 내세우는 대신 “ 나는 약했으며,  두렵고 또 무척 떨면서 ” (1코린 2,3 참조) 다가갔다고 고백합니다. 바오로가...

[묵상] 2026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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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던 이,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증언하다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친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한여름의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요한 세례자의 순교 소식은, 타성에 젖어 있던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며 영적인 전율을 선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기묘하고도 비극적인 내면을 지닌 한 인물, 헤로데 왕을 만나게 됩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할 때 아주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 (마르 6,20). 그는 요한의 예언을 들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 진리의 말씀에 강하게 끌렸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결국 자신의 체면과 세상의 즐거움을 지키기 위해 요한의 목을 베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맙니다. 오늘 주님은 헤로데의 선택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진리를 향한 갈망’과 ‘세상을 향한 집착’ 사이의 치열한 싸움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세상의 권력과 칼날이 아무리 서슬 퍼래도, 하느님의 진리를 품은 영혼은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구원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시며 이렇게 무장시키십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예레 1,17). 하느님은 진리를 전하다 세상의 반대에 부딪힐 그를 ‘요새 성읍, 쇠기둥,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오늘 복음의 요한 세례자를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요한은 헤로데 왕이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부정한 죄를 짓자, 왕의 권력 앞에서도 거침없이 진리를 외쳤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마르 6,18). 비록 이 일로 감옥에 갇혔지만, 요한의 영혼은 하느님이 세우신 견고한 요새 성벽이...

[묵상] 2026년 8월 28일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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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의 위대한 스승이자 영적 거인이신 성 아우구스티노 주교 학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의 저서 《고백록》에서 하느님을 만난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이렇듯 오래고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당신은 제 안에 계셨건만 저는 바깥에 있었고, 줄곧 바깥에서 당신을 찾았습니다.” 오늘 복음의 처녀들처럼, 아우구스티노 역시 오랜 방황의 시간 동안 영혼의 등불을 켜지 못한 채 어둠 속을 헤맸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참된 신랑이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의 영혼은 눈부신 사랑의 빛으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그대들의 영혼에는 지금 사랑의 등불이 밝혀져 있습니까?”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세상이 쫓는 화려함과 인간의 지식이 얼마나 쉽게 꺼지는 등불인지 경고하며, 오직 그리스도라는 영원한 지혜를 주님과 함께 준비해야 함을 가르쳐줍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지혜와 하느님의 지혜를 극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세상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정교한 말재주를 찾지만, 바오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 (1코린 1,18). 세상의 눈에는 무력하고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가 사실은 죽음을 이겨내는 하느님의 가장 깊은 지혜라는 뜻입니다. 젊은 시절 세상 철학 속에서 방황하던 아우구스티노가 결국 무릎을 꿇은 곳도 바로 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앞이었습니다. 이 지혜를 삶으로 살아내는 태도가 오늘 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에 담겨 있습니다. 다섯은 미련했고 다섯은 슬기로웠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겉으로는 등을 들고 있었지만, 정작 신랑이 늦어질 때를 대비한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한밤중에 신랑이 도착했을 때, 기름이 없던 이들은 결국 잔치에 들어가지 못한 채 문이 닫히는 비극을 맞이합니다. 복음에서 슬기로운 처녀들은...

[묵상] 2026년 8월 27일 성녀 모니카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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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강력하면서도 긴박한 어조로 권고하십니다.  “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 (마태 24,42.44). 이 말씀은 신앙의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에게, 지금 이 순간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근원적인 성찰을 촉구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깨어있음’은 결코 두려움이나 불안에 떠는 삶이 아닙니다. 복음에서 주님은 도둑의 비유와 충실한 종의 비유를 통해 그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악한 종은 "주인이 늦어지는구나"라며 방탕하게 살다 엄벌을 받지만, 충실한 종은 주인이 언제 오든 상관없이 자기에게 맡겨진 식구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나누어 줍니다. 곧, 깨어있음은 하늘만 쳐다보며 기적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일상 안에서 묵묵히 책임을 다하는 성실함입니다. 이 성실함을 지탱하는 힘은 바로 하느님의 신실하심에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 그리하여 여러분은 어떠한 은사도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1코린 1,7)라고 선언합니다. 우리는 막연한 불안함 속에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은총을 풍성히 받은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굳세게 버티어 주실 것이기에, 우리는 그분의 신의를 믿고 오늘을 깨어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칭찬하신 ‘지혜로운 종’은 “ 주인이 종에게 자기 집안 식솔들을 맡겨  그들에게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는 ” (마태 24,45)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깨어있음은 특별한 종교 행위에만 몰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곁의 이웃과 가족에게 필요한 사랑과 위로의 양식을 ‘제때’ 전하는 것입니다. 성녀 모니카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방황하는 아들을 보며 절망하거나 신세를 한탄하는 대신, 아들의 영혼이 메말라 ...

[묵상] 2026년 8월 26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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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위선에 사로잡힌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가장 강렬하면서도 아픈 비유를 던지십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축제 때 사람들이 부주의하게 무덤에 부딪혀 부정해지는 것을 막으려고 무덤 겉면에 하얗게 석회를 칠하곤 했습니다. 겉은 눈부시게 깨끗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썩어가는 시신과 뼈가 들어 있는 서글픈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은 종교적 형식주의에 갇힌 이들을 향해 엄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마태 23,28).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내면의 순수함이 일상의 구체적이고 성실한 노동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는 영적 진리를 선포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아주 현실적이고 단호한 권고를 전합니다. 당시 일부 신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곧 닥칠 것이라는 오해에 빠져 생업을 팽개치고 무질서하게 살며 남의 일에 참견만 하곤 했습니다. 바오로는 자신이 밤낮으로 노동하며 복음을 전했던 모범을 상기시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 사실 우리는 여러분 곁에 있을 때,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거듭 지시하였습니다 ” (2테살 3,10). 참된 신앙은 현실을 도피하는 환상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서 정직하게 땀 흘리는 ‘성실한 삶’으로 증명된다는 뜻입니다. 반면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겉보기에는 가장 성실한 종교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꾸미며 자신들은 조상들과 달리 의로운 척 자만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내면은 조상들의 죄악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살아 있는 말씀이신 예수님을 배척하면서 마음속에는 시기와 탐욕을 가득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진실한 삶의 태도를 잃어버린 채, 사람들 눈에 들기 위한 외적인 ‘회칠’에만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느님 앞에서의 가난함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 부유한 척하는 위선’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영적 빈...

[묵상] 2026년 8월 25일 연중 제2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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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시 종교 지도자였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무서운 경고를 던지십니다. 그들은 남들보다 기도를 많이 하고 성경을 잘 알며, 겉보기에는 가장 완벽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을 향해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들아!” 하고 꾸짖으시며 아주 날카로운 비유를 드십니다.  “너희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은 십일조를 내면서, 의로움과 신의와 자비처럼 율법에서 더 중요한 것들은 무시하기 때문이다” (마태 23,23).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너희는 작은 벌레들은 걸러 내면서 낙타는 그냥 삼키는 자들이다” (마태 23,24)라고 덧붙이십니다. 이는 당시 유다인들의 유머가 섞인 아주 강렬한 비유입니다. 포도주를 마실 때 아주 작은 곤충인 하루살이가 들어가면 율법상 부정한 음식이 되기에 정성껏 걸러 내면서도, 정작 율법에서 금지한 가장 거대한 부정한 동물인 낙타는 통째로 삼켜버린다는 뜻입니다. 곧, 겉으로 드러나는 사소한 규칙에는 목숨을 걸면서, 정작 신앙의 핵심인 사랑과 자비는 통째로 잃어버린 그들의 영적 시각장애를 고발하신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우리 신앙의 ‘겉’과 ‘속’이 어떻게 일치해야 하는지, 그리고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우리가 끝까지 붙잡아야 할 ‘본질’이 무엇인지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세상의 유혹이나 잘못된 소문에 흔들리지 말라고 권고하며, “우리의 말이나 편지로 배운 전통을 굳게 지키십시오” (2테살 2,15)라고 당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전통’은 낡은 관습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이어져 온 복음의 본질, 곧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입니다. 이 본질을 굳게 쥘 때 우리의 마음은 굳건해지고, 온갖 선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명목으로 향신료의 잎사귀 개수까지 세어가며 십일조를 바치는 등 종교적 의무에는 완벽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중심에는 이웃을 향한 ‘의로움과 신의와 자비’가 빠져 있었...

[묵상] 2026년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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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의 주춧돌이 된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가 될 필립보의 인도를 따라 찾아온 한 사람을 바라보시며,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극찬을 건네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요한 1,47). 이 칭찬의 주인공이 바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바르톨로메오 사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화려한 겉모습이나 능력이 아니라, 그 내면에 깃든 ‘진실함’을 알아보셨습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겉치레와 편견을 벗겨내고 하느님 앞에 오롯이 마주 서는 영혼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에 참여하게 되는지 보여줍니다. 제1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눈부시게 빛나는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을 묘사합니다. 그 거룩한 도성의 성벽에는 열두 초석이 있고, 그 위에는 ‘어린양의 열두 사도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평범했던 사도들이, 하느님 앞에서는 천상 성전을 떠받치는 가장 견고하고 영광스러운 주춧돌이 된 것입니다. 이 영광스러운 초석 중 하나가 된 바르톨로메오의 첫 부르심 이야기가 오늘 복음에 펼쳐집니다. 처음에 그는 편견에 사로잡힌 인물이었습니다. 필립보가 나자렛 출신의 예수를 만났다고 하자,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요한 1,46) 하며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러나 그는 "와서 보시오"라는 친구의 말에 직접 예수님을 찾아 나서는 솔직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그를 보시며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고 하셨고, 깜짝 놀란 그가 자신을 어떻게 아느냐고 묻자 결정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요한 1,48). 이 한마디에 그의 편견은 눈 녹듯 사라지고 위대한 신앙 고백을 터뜨리게 됩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무화과나무 아래’는 단순히 더위를 피하는 그늘이 아니라, 경건한...

[묵상] 2026년 8월 22일 복된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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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천상의 모후이시며 우리의 어머니이신 ‘복된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입니다. 세상의 왕들은 화려한 왕관을 쓰고 높은 보좌 위에서 군림하지만, 하늘나라의 여왕이신 성모님이 쓰신 왕관은 온전히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겸손’과 ‘순종’으로 엮어진 왕관입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겉만 화려하고 속은 비어버린 인간의 위선을 경고하며, 오직 낮고 순수한 마음에만 하느님의 거룩한 영광이 깃든다는 영적 진리를 선포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바빌론 유배라는 철저한 고독과 성전 파괴의 아픔을 겪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위대한 희망의 환시를 전합니다. 이스라엘이 죄를 지었을 때 떠나갔던 하느님의 영광이 다시 성전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입니다. 주님의 영광이 성전에 가득 차자, 하느님께서는 “이곳은 내 어좌의 자리, 내 발바닥이 놓이는 자리” (에제 43,7)라고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돌아오신 이 성전은,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인간적인 교만의 성벽을 완전히 허물었을 때 비로소 완성된 ‘거룩한 빈자리’였습니다. 이 영광스러운 성전의 실체가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님은 주님의 영광이 온전히 머무시는 하느님의 참된 성전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마주하신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하느님의 성전이 아니라 ‘인간의 성벽’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귀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 (마태 23,3)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묵직한 율법의 짐을 남의 어깨에는 얹어 놓으면서 정작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영광이 머물러야 할 성전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높이 올려두고 사람들에게 인사받기를 즐겼습니다. 주님은 이런 이들을 향해 엄중히 선포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마태 23,12).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마태 23,8)...

[묵상] 2026년 8월 21일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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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가톨릭교회의 위대한 목자이신 성 비오 10세 교황 기념일입니다.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쇄신하겠다"는 신념으로 교회를 이끄셨던 성인은 특히 어린이들이 일찍 첫영체를 모실 수 있도록 배려하며, 모든 신자가 성체성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하도록 이끄신 ‘성체의 교황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율법 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고자 묻습니다.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당시 유다인들은 수백 개가 넘는 복잡한 규정들에 얽매여 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신앙의 본질을 관통하는 가장 명쾌한 답을 주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 22,37.39).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영적으로 죽어 마른 뼈처럼 황량해진 우리 삶을 다시 살려내는 유일한 에너지가 바로 ‘사랑’임을 선포합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장엄한 환시를 목격합니다. 주님의 영이 이끄신 골짜기에는 마른 뼈들이 가득했습니다. 이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말씀을 전하시자 뼈들이 맞춰지고 살이 오르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하느님의 ‘숨’(생기)이 들어가자 그들이 살아나 엄청난 군대를 이룹니다. 하느님은 절망에 빠진 이들에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 안에 내 영을 넣어 주어 너희를 살린다” (에제 37,14). 이 마른 뼈들에 생명을 불어넣는 하느님의 숨결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선포된 ‘사랑의 계명’입니다. 율법 조항에만 갇혀 하느님의 마음을 잃어버린 채 ‘마른 뼈’처럼 굳어 있던 이들에게, 예수님은 오직 사랑만이 인간을 살리는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일깨워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서로 “이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두 계명이 동등하게 중요하며,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뜻합니다. 하...

[묵상] 2026년 8월 20일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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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12세기 교회의 위대한 영적 스승이자, 하느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수많은 영혼을 인도하셨던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구원 역사를 흥겨운 ‘임금의 혼인 잔치’ 비유로 들려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마련해 두시고 기쁜 얼굴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가 잔칫상을 이미 차렸소. 어서 혼인 잔치에 오시오” (마태 22,4).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완고함과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새 마음’을 불어넣으시며 당신의 기쁨 속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집요한 사랑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유배 생활로 영적 황폐함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에게 놀라운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비록 그들이 하느님을 배신하여 주님의 이름을 더럽혔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깨끗이 씻어주시고 결정적인 은총을 약속하십니다. “너희에게 새 마음을 주고 너희 안에 새 영을 넣어 주겠다. 너희 몸에서 돌로 된 마음을 치우고, 살로 된 마음을 넣어 주겠다” (에제 36,26).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의 법을 따르는 참된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새 마음과 새 영’의 상태가 바로 복음에서 요구되는 ‘혼인 예복’과 연결됩니다. 임금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불렀지만, 그들은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는 밭으로 가고 어떤 이는 장사하러 가버렸으며, 심지어 임금의 종들을 때리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물질적 욕심과 무관심이 하느님의 호의를 짓밟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임금은 고을 어귀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잔치에 초대하여 잔칫방을 가득 채웁니다.  하지만 예복을 입지 않고 앉아 있는 한 사람을 발견한 임금은 그를 어둠 속으로 내던지라고 명령하며 엄숙하게 선언하십니다. “사실 부르심을 받은 이들은 많지만 선택된 이들은 적다” (마태 22,14). 임금이 예복을 요구한 것은 가난을 따지기 위함이 아...

[묵상] 2026년 8월 19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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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아가면서 은연중에 ‘세상의 계산법’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일한 만큼 받아야 하고, 투자한 만큼 거두어야 한다"는 논리는 공정해 보이지만, 때로는 우리의 마음을 팍팍하게 만들고 타인을 시기하게 합니다. 열심히 사는데도 나보다 늦게 시작한 이가 더 잘되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 마음속에는 억울함과 불만이 피어오르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원 주인은 아침 일찍부터 뙤약볕 아래서 땀 흘린 일꾼들과, 마칠 때가 다 되어 겨우 한 시간 일한 일꾼들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값을 건넵니다. 그리고 이에 불평하는 이들을 향해, 우리 신앙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마태 20,15). 이 비유는 인간의 이기적인 계산법을 넘어, 소외되고 뒤처진 이들을 끝까지 찾아내어 똑같은 사랑으로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압도적인 자비를 선포합니다.  오후 다섯 시에 들어온 이들은 게을러서 논 것이 아니라, 세상의 고용 시장에서 선택받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소외된 이들이었습니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 20,7)라는 그들의 대답처럼, 주인은 그들의 노동 시간이 아니라 그들이 오늘 밤 가족에게 가져가야 할 양식을 걱정했기에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베푼 것입니다. 아침 일찍 온 일꾼들은 주인의 처사에 분통이 터졌지만, 그들은 치명적인 진실 하나를 놓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아침 일찍 주인에게 간택되어 온종일 굶주릴 걱정 없이 안전한 포도원 안에서 일할 수 있었던 ‘선택의 은총’입니다. 반면 오후 다섯 시에 온 이들은 온종일 극심한 불안과 절망 속에서 장터를 헤매던 이들이었습니다. 주인의 한 데나리온은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그 절망을 채워주는 ‘자비의 선물’이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아침 일찍 온 일꾼의 태도를 취하곤 합니다. "내가 봉사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라며 공로를 내세우고, 뒤늦게 회개하고 돌아온 이들을 시샘합니다. 그러...

[묵상] 2026년 8월 18일 연중 제20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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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매우 당혹스러우면서도 강력한 비유를 던지십니다. 어제 복음에서 많은 재물 때문에 슬퍼하며 떠나간 부자 청년의 뒷모습을 보시며 하신 말씀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 19,24).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아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며 술렁였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 손에 쥐어진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지 일깨우시며, 구원의 참된 주권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내 힘과 소유를 의지하는 교만을 버리고,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을 삶의 중심에 모시는 전적인 신뢰’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 티로의 군주를 꾸짖으십니다. 티로는 당시 해상 무역으로 막대한 부와 권력을 누리던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풍요에 취한 군주는 마음이 교만해져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에제 28,2). 하느님은 그를 향해 “너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며, 그가 의지하던 재물과 지혜가 침략 앞에서 얼마나 무력하게 무너질지 경고하십니다. 재물이 주는 풍요가 인간을 스스로 신의 자리에 앉히는 무서운 ‘교만’을 낳은 것입니다. 티로 군주의 교만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경고하신 ‘부자의 위험성’과 일맥상통합니다. 여기서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내 재산, 지식, 경험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으며, 하느님 없이도 내 힘으로 완벽하게 살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영적 부자’를 의미합니다. 낙타가 좁은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듯이, 자신의 성벽을 높이 쌓아 올린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은총이 들어갈 틈이 없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는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그러면 누가 구원...

[묵상] 2026년 8월 17일 연중 제20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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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는 세상적인 기준으로 보면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는 한 젊은이가 등장합니다. 그는 많은 재산과 젊음,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모두 가졌을 뿐만 아니라, 어릴 때부터 계명을 철저히 지켜온 성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 완벽해 보이는 젊은이가 예수님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묻습니다.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마태 19,16.20). 이 질문은 당당해 보이지만, 사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는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불안이 숨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 신앙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르는 결단의 말씀을 통해 그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해야 한다는 무거운 영적 과제를 던져줍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인간으로서 감당하기 힘든 명령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눈의 즐거움이었던 아내를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거두어가시며, 슬퍼하거나 눈물을 흘리지 말고 묵묵히 예언자의 직무를 수행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곧 닥쳐올 예루살렘의 멸망이라는 비극 앞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슬퍼할 겨를도 없이 죄의 대가를 치러야 함을 보여주는 ‘예표’였습니다. 에제키엘은 자신의 가장 큰 인간적 슬픔마저 하느님의 표징을 위해 제단에 바쳐야 했던 것입니다. 이 아픈 내려놓음의 신비는 오늘 복음 의 젊은이에게도 요구됩니다. 계명을 다 지켰다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완전함’의 길을 보여주십니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마태 19,21). 예수님은 지금 그가 목숨처럼 의지하던 ‘재물’이라는 안전지대에서 걸어 나오라고 초대하십니다. 에제키엘이 아내에 대한 슬픔을 내려놓았듯, 이 젊은이 역시 재물에 대한 소유권을 내려놓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결말은 안...

[묵상] 2026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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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가장 무더운 8월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오늘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기쁨이자 희망의 축일인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유난히 뜨거운 올여름의 열기 속에서, 저마다 삶의 무게를 지고 고단한 일상을 살아가는 교우 여러분에게 하늘로 부름받으신 성모님의 따뜻한 위로와 평화가 가득하기를 빕니다. 오늘 엘리사벳이 성모님을 향해 외친 이 한마디는 시대를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가슴을 울리는 축복의 선언입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루카 1,45).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 이가 맞이하게 될 최종적인 승리와 영광을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제1독서인 요한 묵시록은 ‘태양을 입고 발밑에 달을 둔 여인’의 환시를 보여줍니다. 이 여인은 메시아를 탄생시키지만, 그 아기를 삼키려는 거대한 용의 위협을 피해 광야로 달아나야 했습니다. 이는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곁에서 지켜보며 심장이 꿰찔리는 아픔을 겪어야 했던 성모님의 삶을 상징함과 동시에, 세상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내는 교회 공동체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척박한 광야에서 여인을 끝까지 보호하십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승리의 근거를 명확히 제시합니다. 첫 사람 아담으로 인해 모든 사람이 죽었지만, 새로운 아담이신 그리스도의 부활로 인해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로 부활하셨고, 그다음은 그리스도께 속한 우리들의 차례입니다. 이 구원의 약속이 가장 완벽하고 아름답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성모 승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성모님은 구원의 신비를 찬미하는 위대한 노래, ‘마니피캇’(Magnificat)을 부르십니다. 성모님은 당신의 비천함을 돌보시어 큰일을 행하신 하느님을 찬양하며, 권세 있는 자들을 내치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올리시는 하느님의 반전(反轉)을 선포하십니다. 이 찬가의 고백대로 지상에서 가장 비천하고 겸손한 종으로 사셨던 성모님은...

[묵상] 2026년 8월 14일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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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죽음의 골짜기에서, 이웃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으신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사제의 순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성인께서는 어둠의 한복판에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위대한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미움은 파괴하지만, 사랑만이 창조합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이기심과 분열로 멍든 우리 시대를 향해,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하느님의 영원한 ‘사랑의 법’을 선포하십니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깨어지기 쉬운 인간의 약속과 이를 완성하시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이스라엘의 영적 배신을 아프게 지적하십니다. 비천하던 시절 하느님의 과분한 사랑으로 왕비처럼 고귀해졌음에도, 이스라엘은 제 아름다움에 취해 하느님을 배신했습니다. 인간적인 계약대로라면 당장 파기되어 마땅한 배신이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허물보다 컸습니다.  “나는 네가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내 계약을 기억하고, 너와 영원한 계약을 세우겠다” (에제 16,60). 이처럼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당신의 자비로 완전히 덮어주심으로써, 우리를 다시 부끄럽게 만들고 진정한 회개로 이끄십니다. 이 영원한 사랑의 성격은 복음에서 예수님의 ‘혼인 가르침’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혼인이 인간의 편의나 조건에 따라 맺고 끊는 계약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친히 짝지어 주신 신성한 신비임을 일깨우십니다.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하느님께서 맺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 (마태 19,6). 주님께서 말씀하신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은 단순히 부부 관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우리 영혼의 관계 그리고 우리가 이웃과 맺는 사랑의 본질을 꿰뚫는 영적 통찰입니다. 세상은 철저히 조건에 따라 움직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면 곁에 두고, 손해가 되거나 마음이 맞지 않으면 쉽게 갈라섭니다. 하지만 참된 사랑은 ‘조건...

[묵상] 2026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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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혹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동안 가장 하기 힘든 숙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용서’입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주고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을 용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려 해도 막상 그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금 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안고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마태 18,21).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완고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비로 걸어 나오는 삶’이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대낮에 이삿짐을 꾸리고 밤에는 벽을 뚫고 길을 떠나는 기이한 행동을 명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보지도 않는 ‘반항아들의 집안’인 이스라엘이 완고함 때문에 결국 바빌론 유배라는 비극적인 짐을 짊어지게 될 것임을 온몸으로 예고한 것입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닫아거는 완고함은 결국 스스로를 고통의 유배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완고함의 사슬을 끊어내는 하늘나라의 방식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선포로 드러납니다. 당시 유다 사회의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제시하며 스스로 대견해했을 베드로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마태 18,22). 이는 용서에 숫자의 제한을 두지 말고, 끝없이 무한하게 자비를 베풀라는 명령입니다. 이어지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만 탈렌트’의 빚을 단번에 탕감받고도, 정작 자신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종은 결국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께 받은 자비의 크기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도저히 갚을 수 없...

[묵상] 2026년 8월 12일 연중 제1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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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가장 힘겨운 숙제는 무엇일까요? 경제적 어려움이나 건강 문제도 크지만, 결국 우리를 가장 깊이 아프게 하고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인간관계의 갈등’입니다. 가정과 직장, 심지어 성당 공동체 안에서조차 우리는 서로 오해하고 상처를 주고받습니다. 마음이 틀어지면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것조차 고통이 되고, 결국 우리가 소중히 가꾸어 온 공동체의 평화는 깨어지고 맙니다.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죄로 인해 깨어진 거룩함의 위기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영적 책임감’이라는 주제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가슴 아픈 환시를 목격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숭배와 불의가 극에 달하자, 마침내 주님의 영광이 성전을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머무셔야 할 거룩한 성전이 죄로 더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멸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의 가증한 일들 때문에 " 탄식하고 괴로워하는 사람들" (에제 9,4)의 이마에 표징을 찍어 그들을 구원하십니다. 공동체의 죄악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며 눈물로 기도하는 이들을 통해, 하느님은 다시 자비의 손길을 펴십니다. 죄로 얼룩진 공동체의 거룩함을 회복하는 구체적인 방법이 오늘 복음에서 선포됩니다. 주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지었을 때 뒷공론을 하거나 소문을 내는 대신, 단계별로 실천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첫째는 ‘가서 단둘이 만나 그의 잘못을 타이르는 것’입니다. 이 절차의 핵심은 상대를 단죄하여 쫓아내는 데 있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그 영혼을 부끄럽지 않게 보호하고 회복시켜 ‘형제를 얻기 위함’(마태 18,15 참조)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마태 18,19). 우리는 누군가 나에게 잘못을 저지르면 복음의 말씀과는 반대로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당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