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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6년 8월 1일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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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의 첫날을 시작하는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인간의 평가와 시선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오직 하느님의 진리만을 바라보는 ‘참된 용기’가 무엇인지 묻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될 것이라는 하느님의 엄중한 경고를 그대로 전했다는 이유로, 사제들과 거짓 예언자들에게 붙잡혀 사형 재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성전 뜰을 가득 메운 군중과 고관들 앞에서도 예레미야는 도망치거나 말을 바꾸지 않고 눈을 들어 당당하게 선포합니다.  “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이 집과 도성에 대하여 여러분이 들으신 이것을 예언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의 길과 행실을 고치고,  주 여러분의 하느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거두실 것입니다.  이 내 몸이야 여러분 손에 있으니  여러분이 보기에 좋을 대로 바르게 나를 처리하십시오 ” (예레 26,12-14). 인간적인 두려움을 이겨내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만을 기준 삼았던 이 의연한 태도는 고관들과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람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아히캄의 손길을 통해 예레미야를 죽음의 위기에서 건져주십니다.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고 하느님의 편에 설 때,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백성을 책임져 주신다는 위대한 신앙의 승리를 보여줍니다. 반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영주 헤로데는 예레미야와 정반대의 비참한 길을 걸어갑니다. 헤로데는 동생의 아내와 혼인하는 죄를 저질렀고, 세례자 요한은 이를 "옳지 않다"고 엄히 꾸짖었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고 싶었지만, 그를 예언자로 여기는 군중의 눈치가 두려워 감옥에 가두어 두기만 했습니다. 비극은 허영과 향락이 가득한 생일 잔칫날에 일어납니다. 헤로디아의 딸이 춤을 추자 흥이 난 헤로데는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만백성 앞에서 맹세합니다. 어머니의 조종을 받은 딸이 요한...

[묵상] 2026년 07월 31일 금요일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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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과 그분의 현존을 가로막는 인간의 거대한 장벽인 ‘완고함’과 ‘선입견’에 대해 엄중히 경고합니다. 아울러 오늘 기념하는 성 이냐시오 데 로욜라 사제의 삶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그 완고함의 사슬을 끊고 온전히 하느님의 영광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지 그 영적 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막중하고도 위험한 임무를 맡기십니다. 성전 뜰에 서서 예배하러 오는 유다 백성들을 향해, 악한 길에서 돌아서지 않으면 이 성전을 황폐하게 만들겠다는 주님의 경고를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전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백성들과 사제들의 반응은 싸늘하다 못해 폭력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의 멱살을 잡고 “너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며 분노를 터뜨립니다. 자신들의 죄를 아프게 찌르는 하느님의 진리를 듣기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는 성전에서 제사를 바치고 있으니 안전하다”는 종교적 안일함과 고집에 갇혀, 자신들을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가슴 아픈 통곡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1독서의 유다 지도자들과 똑같은 ‘영적인 눈먼 상태’가 예수님의 고향 나자렛에서 재현됩니다. 예수님께서 고향 회당에서 지혜롭게 말씀을 가르치시자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만, 그 감탄은 이내 의심과 시기심으로 바뀝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마태 13,54-55).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대신 자신들이 수십 년 동안 보아왔던 ‘가난한 목수 집안의 청년’이라는 선입견의 틀에 그분을 가두어 버렸습니다. "내가 저 사람을 어릴 때부터 잘 아는데 별수 있겠어?"라는 익숙함과 교만이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게 만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국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시며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

[묵상] 2026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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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를 아주 생생하고 구체적인 일상의 비유를 통해 설명해 줍니다. 제1독서의 ‘옹기장이와 진흙’, 그리고 복음의 ‘그물과 물고기’ 비유는 내 뜻대로 인생을 쥐고 흔들려는 우리의 완고함을 내려놓고, 주님의 거룩한 손길과 섭리에 온전히 응답할 것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를 옹기장이의 집으로 보내십니다. 예레미야가 보니 옹기장이는 물레를 돌리며 정성껏 그릇을 빚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진흙 그릇이 손에서 망가지자, 옹기장이는 낙심하거나 흙을 버리는 대신 자기 눈에 드는 다른 그릇으로 다시 빚어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를 향한 당신의 절대적인 주권을 선포하십니다. “이스라엘 집안아,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옹기장이처럼 너희에게 할 수 없을 것 같으냐? 이스라엘 집안아, 옹기장이 손에 있는 진흙처럼 너희도 내 손에 있다” (예레 18,6). 참으로 위로가 되면서도 엄숙한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십니다. 진흙 스스로가 "나는 이런 모양의 그릇이 될 거야" 하고 고집을 부릴 수 없듯이, 피조물인 우리 역시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을 앞설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거나 고통스러운 순간을 맞이할 때 하느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옹기장이이신 하느님은 우리를 파괴하기 위해 깨뜨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아름답고 단단한 하늘나라의 명품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우리의 모나고 이기적인 부분을 은총의 손길로 다시 주무르고 계시는 과정일 뿐입니다. 주님의 손길에 나를 온전히 맡긴 영혼들은 오늘 복음이 말하는 하늘나라의 ‘좋은 물고기’가 되어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 비유의 마지막으로 ‘그물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하늘나라는 바다에 던져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모아들인 그물과 같습니다. 그물이 가득 차면 어부들은 그것을 물가로 끌어 올려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

[묵상] 2026년 7월 29일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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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일상 속에서 가장 친밀하게 정을 나누시며 당신의 피로와 외로움을 달래셨던 ‘베타니아의 세 남매’, 성녀 마르타와 성녀 마리아와 성 라자로를 함께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요한 1서의 말씀과 복음의 선포는 하나의 거대한 진리로 맞물려 있습니다. 우리가 삶의 숱한 절망과 죽음의 그늘 속에서도 어떻게 ‘부활과 생명’을 미리 맛보며 살 수 있는지, 그 유일한 열쇠가 바로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에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은 신앙생활의 가장 깊은 본질이자 하느님의 정체성을 한 문장으로 선포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1요한 4,8). 이 사랑은 우리가 먼저 하느님을 사랑해서 얻어낸 대가가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고 나약했을 때, 하느님께서 먼저 당신의 외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를 위한 속죄 제물이 되게 해 주신 ‘선행적인 사랑’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 과분한 사랑을 받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을 명확히 제시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1요한 4,11-12).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내 곁의 형제자매를 구체적으로 사랑할 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우리 삶에 생생하게 드러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베타니아로 달려가십니다. 슬픔에 잠긴 마르타를 향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누구이신지 놀라운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요한 11,25). 이 선언은 단순히 멈춘 심장이 다시 뛰는 생물학적 기적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람은 이미 죽음을 뛰어넘는 영원한 생명을 지금 이 자리에서 살기 시작했다는 선포입니다. 마르타는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

[묵상] 2026년 7월 28일 연중 제17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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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속의 어둠과 아픔을 정직하게 직시하게 합니다. 동시에 그 고단한 현실 너머에 준비된 하느님의 최종 승리와 영광을 약속하며 우리에게 큰 희망을 전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참혹한 위기에 처한 조국 유다를 바라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가뭄과 전쟁으로 땅은 메말랐고, 백성들은 굶주림과 칼날 앞에 쓰러져 갑니다. 예언자는 이 비극을 목격하며 하느님의 슬픈 본심을 다음과 같이 대변합니다.  “내 눈에서 눈물이 흘러 밤낮으로 그치지 않는다. 처녀 딸 내 백성이 몹시 얻어맞아 너무도 참혹한 상처를 입었기 때문이다” (예레 14,17). 예레미야가 흘리는 눈물은 단순한 절망의 눈물이 아닙니다. 비록 백성들의 죄 때문에 닥친 재앙일지라도,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등에 지고 하느님 앞에 나아가 “당신의 이름을 보아서라도 저희를 저버리지 마십시오”라고 매달리는 간절한 ‘중재의 눈물’입니다. 우리 삶 역시 때로는 황량한 벌판 같을 때가 있습니다. 내 잘못이나 세상의 모순으로 인해 영적 가뭄과 마음의 상처를 입고 눈물지을 때, 주님은 그 눈물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눈길로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계십니다. 세상에 왜 이토록 아픔과 모순이 가득한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가라지 비유’를 통해 그 영적 비밀을 명확히 설명해 주십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주님이시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들입니다. 하지만 그 밭에는 한밤중 몰래 가라지(악마의 자녀들)를 뿌려놓은 원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이 살아계신다면 왜 악인들이 판을 치게 내버려 두실까?” 혹은 “왜 성당 안에서도 상처를 주는 사람이 있을까?”라며 의문을 품습니다. 이에 대한 주님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세상 종말의 날까지는 선과 악이 한 울타리 안에서 함께 자라도록 일단 ‘인내하며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당장 가라지를 뽑으려다가는 그 곁에 있는 소중한 밀(의인들)의 뿌리까지 다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인에게...

[묵상] 2026년 7월 27일 연중 제17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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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가 얼마나 밀착되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는 동시에, 비록 지금 우리의 모습이 작고 보잘것없을지라도 하느님의 손에 들려질 때 세상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선포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에게 매우 독특하고 시각적인 ‘몸짓 언어’로 예언하게 하십니다. 아마포 띠를 사서 허리에 두르고, 그것을 유프라테스 강가 바위 틈새에 숨겨두라는 명령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다시 꺼내 본 베 띠는 물기와 흙 때문에 완전히 썩어 아무 쓸모가 없게 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상한 아마포 띠를 통해 우리에게 중요한 영적 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띠가 사람의 허리에 붙어 있듯이 내가 온 이스라엘 집안과 온 유다 집안을 나에게 붙어 있게 한 것은 그들이 내 백성이 되어 명성과 칭송과 영광을 얻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순종하지 않았다” (예레 13,11). 허리띠는 사람의 몸에 가장 가깝고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을 때만 제 구실을 합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곁에 바짝 붙어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거룩한 존재 이유와 영광을 지니게 됩니다.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하느님의 품을 벗어나 세상 유혹의 상징인 유프라테스 강가로 가버렸습니다. 주님의 허리에서 풀려나 세상의 습기 속에 방치된 영혼은 바위 틈새의 아마포 띠처럼 스스로 썩어갈 뿐입니다. 주님의 허리에 단단히 묶여 그분으로부터 생명의 진액을 받는 영혼들은 오늘 복음이 말하는 ‘겨자씨’와 ‘누룩’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겨자씨에 비유하십니다. 겨자씨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작고 미미한 씨앗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땅에 심겨 자라나면 사람 키를 훌쩍 넘는 큰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오늘 아침 바친 짧은 화살기도 한 줄, 가족에게 건넨 다정한 말 한마디가 바로 내 영혼에 심기는 겨자씨입니다. 당장 눈에는 변화가 없는 것 같아...

[묵상] 2026년 7월 25일 성 야고보 사도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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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열두 사도 중 한 분이자 요한 사도의 형제이며, 사도들 가운데 첫 번째로 순교의 영광을 입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입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야고보 사도의 삶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 ‘참된 위대함’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 과연 어떤 잔을 마시는 일인지를 생생하게 가르쳐 줍니다. 오늘 복음에는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다가와 절을 하며 한 가지 청을 올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마태 20,21)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시면 로마를 몰아내고 이스라엘의 강력한 왕이 되실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의 어머니와 두 형제는 세상 권력을 미리 선점하기 위해 일종의 ‘인사 청탁’을 하러 온 것입니다. 이를 지켜본 다른 열 제자들 역시 두 형제에게 크게 불쾌해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하게 주님을 따르는 듯 보였지만, 제자들의 마음 밑바닥에는 똑같이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하는 세상적인 야심과 시기심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철없는 야심을 꾸짖는 대신, 다정하면서도 준엄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마태 20,22). 두 형제는 그 잔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큰소리로 “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들이 상상한 잔은 승리의 축배이자 영광의 잔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마시려는 잔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 하는 ‘고난과 죽음의 잔’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지배자들처럼 남을 억누르고 군림하는 자리가 결코 하늘나라의 자리가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의 질서는 세상의 질서와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묵상] 2026년 7월 24일 연중 제16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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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며칠 전 우리에게 들려주셨던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친절하고 명확하게 해설해 주십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에서 왜 어떤 이에게는 100배의 기적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지, 그 영적인 비밀을 아주 구체적으로 짚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씨앗이 떨어진 네 가지 밭을 우리 영혼의 상태에 비유하십니다. 첫째는 길바닥 같은 마음입니다.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 이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형식적으로 오래 하다 보니 마음이 단단한 아스팔트처럼 굳어버린 상태입니다. 말씀이 마음 표면에만 머물러 있으니, 악마가 와서 그 기억과 감동을 쉽게 낚아채 갑니다. 둘째는 돌밭 같은 마음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은혜받았다"며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하지만 마음에 깊이가 없어, 신앙 때문에 조금만 손해를 보거나 집안에 시련(환난과 박해)이 닥치면 이내 서운해하고 실망하여 쓰러지고 맙니다. 뿌리가 얕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가시덤불 같은 마음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앓고 있는 영적 질병입니다. 성당에 앉아있으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 (마태 13,22)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근심이 더 크다 보니, 말씀의 기운이 숨이 막혀 자라지 못합니다. 넷째는 좋은 땅입니다. 말씀을 귀담아듣고 깊이 깨달아, 삶 속에서 묵묵히 실천하는 영혼입니다. 이들의 삶에서는 반드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의 아름다운 사랑의 열매가 맺힙니다. 때로는 내 마음이 가시덤불이나 돌밭 같아 보여 낙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우리를 방치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배반했던 백성들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내 마음에 드는 목자들을 보내 리니, 그들이 너희를 지식과 슬기로 돌볼 것이다” (예레 3,15). 참된 목자는 굳어버린 양들의 마음 밭을 말씀의 쟁기로 갈아엎고, 영혼의 돌멩이를 골라내 주는 이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

[묵상] 2026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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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영혼이 겪는 깊은 갈증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짚어주고, 그 갈증을 채워줄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아듣는 눈과 귀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오늘부터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서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시절에 지녔던 순수한 사랑을 애틋하게 추억하십니다. 이스라엘은 처음에 하느님께 온전히 바쳐진 거룩한 첫 열매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 풍요를 누리게 되자, 그들은 하느님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지도자들과 사제들마저 하느님을 찾지 않고 우상을 좇는 기가 막힌 배반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비극적인 모습을 두 가지 악으로 요약하십니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이신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동굴을 팠다” (예레 2,13).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생수’는 끊임없이 솟아나는 천연 샘물을 뜻하지만, ‘저수동굴’은 빗물을 모아두기 위해 인공적으로 판 바위 구덩이입니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며, 바위에 금이라도 가 있으면 물은 모두 새어 나가 버립니다. 하느님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물을 곁에 두고도, 세상의 재물과 권력이라는 ‘썩고 새어 나갈 인공 구덩이’를 파기 위해 인생의 온 힘을 낭비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고발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 묻습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마음이 완고해져서 보고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아쉬워하십니다. 그들은 주님의 기적을 보면서도 믿지 않았고, 말씀을 들으면서도 자신들의 고집을 꺾지 않았습니다. 반면, 부족하지만 주님 곁에 머물며 그분의 말씀을 새기려 애쓰는 제자들을 향해서는 축복을 선언하십니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

[묵상] 2026년 7월 22일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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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교회가 참으로 아름답고 뜻깊게 기념하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마리아 막달레나를 ‘사도들의 사도’로 높이시며, 이 날을 의무 축일로 격상하셨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절망의 한가운데서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 하나로 어둠을 뚫고 나아간 한 여인의 위대한 신앙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주간 첫날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신 후, 제자들은 두려움에 싸여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지만, 마리아를 움직이게 한 것은 그 두려움을 뛰어넘는 ‘사랑’이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려 비참한 삶을 살던 자신을 구원하시고 인간다운 존엄성을 찾아주셨던 예수님, 그분이 사라졌다는 슬픔에 마리아는 무덤가에서 통곡합니다.  천사들이 “여인아, 왜 우느냐?” 하고 묻자 그녀는 대답합니다. “누가 저의 주님을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13). 마리아의 관심은 오직 ‘내 사랑하는 주님’이 어디 계시는가뿐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의 고백처럼 “나는 잠자리에서 밤새도록 내가 사랑하는 이를 찾아다녔네” (아가 3,1) 하는 그 간절함이 마리아의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뒤에 서 계셨지만, 그녀는 눈물에 가려 그분이 주님이신 줄 알아보지 못하고 정원지기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라는 무모하고도 절절한 사랑의 고백 앞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그녀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마리아야!”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담겨 있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을 향한 웅장한 외침이 아니라, 고통받던 그녀를 처음 만나 구원해 주셨던 바로 그 다정하고 친밀한 목소리였습니다. 주님이 이름을 부르시는 순간, 마리아를 짓누르던 절망의 어둠이 단번에 걷히고 통곡은 기쁨의 찬미로 바뀝니다. 마리아는 돌아서서 히브...

[묵상] 2026년 7월 21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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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를 끝없이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위대한 자비’와, 그 자비에 힘입어 우리가 삶으로 증명해야 할 ‘새로운 신앙의 관계’에 대해 깊은 가르침을 줍니다. 오늘 제1독서인 미카서의 결론부는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감동적인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을 끊임없이 배반하고 상처를 드렸지만, 예언자는 하느님의 본심이 결코 심판이 아니라 ‘신실한 사랑’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당신의 소유인 남은 자들, 그들의 허물을 용서해 주시고 죄를 못 본 체해 주시는 당신 같으신 하느님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분은 분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들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당신께서 저희의 모든 죄악을 바다 깊은 곳으로 던져 주십시오” (미카 7,18-19). 하느님은 우리의 죄를 단순히 못 본 체하며 넘기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악을 발로 ‘짓밟아’ 완전히 부수시고, ‘바다 깊은 곳’에 던져버리시는 분입니다. 바다 깊은 곳에 가라앉은 물건은 인간의 힘으로는 다시 건져 올릴 수 없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참회할 때, 과거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도 않으시고 온전히 지워버리십니다. 우리가 매번 고백 성사를 통해 경험하는 놀라운 은총이 바로 이 ‘바다 깊은 곳에 던져지는 용서’입니다. 이토록 위대한 용서와 자비를 체험한 이들은 이제 세상의 끈이 아닌, 하느님의 끈으로 묶인 ‘새로운 가족’으로 초대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을 전하고 계실 때, 성모 마리아와 형제들이 밖에서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곁에 있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파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이다” (마태 12,50). 이 말씀은 결코 육신의 어머니인 성모님과 가족들을 외면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는 성모...

[묵상] 2026년 7월 20일 연중 제16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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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어떤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종종 눈에 보이는 기적이나 화려한 축복만을 바라며 하느님을 찾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은 외적인 형식이 아닌 ‘삶의 변화’와 ‘겸손한 동행’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미카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과 일종의 ‘법정 공방’을 벌이십니다. 하느님은 이집트 종살이에서 그들을 구해내고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으나, 백성들은 그 은혜를 잊고 하느님과 멀어졌습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백성들은 번제물이나 엄청난 양의 제물, 화려한 종교 의식으로 하느님의 마음을 사려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미카 예언자의 입을 통해 구약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신앙의 본질’을 선포하십니다.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이고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께서 너에게 이미 말씀하셨다. 공정을 실천하고 신의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느님과 함께 걷는 것이 아니냐?” (미카 6,8)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화려한 제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일상입니다. 세상에서 정의롭게 살고(공정), 이웃에게 따뜻한 사랑을 베풀며(자애), 내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의 손을 잡는 것(겸손한 동행)이야말로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참된 예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본질을 놓친 채 겉모습에만 집착하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이미 수많은 기적을 목격하고도 예수님을 시험하며 더 자극적인 표징을 요구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주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 그러나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태 12,39). 요나가 물고기 배 속에서 사흘 만에 살아나 니네베를 회개시켰듯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표징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코앞에서 더 크신 분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

[묵상] 2026년 7월 18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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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오늘, 성경 말씀은 세상의 비정함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하느님의 지극한 온유함과 자비를 보여줍니다. 제1독서의 권력자들은 자신의 힘을 믿고 밤낮으로 악을 꾸미며 약자들을 짓밟지만, 복음의 예수님은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 속에서도 오히려 상처받은 이들을 조용히 치유하시며 참된 구원자의 길을 걸어가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미카 예언자는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의 깊은 영적 타락을 고발합니다. 그들은 침상에 누워서도 어떻게 하면 남의 것을 빼앗을까 끊임없이 불의를 꾸미며, 아침이 되면 “그들은 능력이 있어 아침이 밝자마자 실행에 옮기는” (미카 2,1) 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하느님의 법도, 이웃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도 없습니다. 오직 '내 손의 힘'만이 유일한 정의이자 법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세상은 이처럼 힘의 논리로 움직이며, 강한 자는 살아남고 약한 자는 짓밟히는 것이 비정한 법칙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엄중한 재앙을 예고하십니다. 인간이 쥐고 있는 임시적인 힘은 결코 영원할 수 없으며, 이웃의 눈물 위에 세운 성벽은 결국 허물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지도자들이 힘을 과시할 때, 온 우주의 주인이신 예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나라를 세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하지만, 예수님은 그 음모를 아시고도 그들과 맞서 싸우는 대신 조용히 그곳을 물러나십니다. 권능을 지닌 예수님이라면 하늘의 군대를 불러 그들을 단번에 심판하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큰소리를 내거나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따라온 많은 군중의 병자들을 모두 고쳐주시며, 이 일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엄히 당부하십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 고요하고 겸손한 행보를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빌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마태 12,19). 주님의 구원은 시끄러...

[묵상] 2026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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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이 결코 차가운 규칙에 매몰된 분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나약함과 고통에 깊이 공감하시며,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는 ‘자비와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의 현군 히즈키야 왕은 죽음을 준비하라는 청천벽력 같은 선고를 받습니다. 이때 그가 취한 행동은 참으로 절박했습니다. 그는 얼굴을 벽 쪽으로 돌리고 주님께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여기서 벽을 향했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인간적인 수단을 차단한 채, 오직 하느님 한 분만을 독대하겠다는 절박한 선택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진실한 눈물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다. 자, 내가 너의 수명에다 열다섯 해를 더해 주겠다” (이사 38,5). 하느님은 당신이 내리신 결정마저도 자녀의 눈물 섞인 기도 앞에서는 바꾸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화려한 제물이 아니라, 오직 그분만을 의지하며 흘리는 진실한 눈물입니다. 복음에서는 히즈키야가 만난 자비의 하느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는 바리사이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배고픈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것을 보고 즉각 고발합니다. 그들은 안식일 법의 참된 정신은 잊은 채, 수백 가지 자잘한 규칙이라는 ‘문자의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굶주린 인간의 아픔보다는 규칙 준수 여부만을 따지는 차가운 심판의 눈만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그들을 향해 호세아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꾸짖으십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 (마태 12,7-8). 여기서 ‘자비’는 형제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고 감싸주는 사랑의 마음입니다.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을 규칙으로 얽매기 위함이 아니라, 지친 이들에게 참된 안식을 주기 위함입니다. 본질인 사랑을 잃어버린 신앙은 성전 마당만 더...

[묵상] 2026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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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리는 침묵과 기도, 그리고 하느님과의 깊은 친교를 상징하는 ‘카르멜산의 복된 동정 마리아’를 기억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세상살이의 고단함 속에서 영적인 갈증을 느끼는 우리 모두를 향해, 주님께서 친히 마련해 두신 가장 안전하고 다정한 피난처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향한 영혼의 간절한 갈망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의 영혼이 밤에 당신을 열망하며 저의 넋이 제 속에서 당신을 갈망합니다” (이사 26,9). 여기서 ‘밤’은 단순히 해가 진 시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시련, 마음의 어둠, 그리고 내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예언자는 그 막막한 어둠 속에서도 세상의 헛된 위로를 찾아 헤매지 않았습니다. 오직 참된 평화를 베푸시는 하느님 한 분만을 그리워하며 깨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하는 카르멜산 역시 엘리야 예언자가 참 하느님을 만나고 성모 마리아의 영성이 깊게 뿌리내린 ‘침묵과 기도의 산’입니다. 잠시 세상의 소음에서 물러나 우리 마음속 카르멜산으로 올라갈 때, 우리는 밤을 밝히는 하느님의 현존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어둠 속에서 주님을 찾는 이들을 향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류 역사상 가장 따뜻한 위로를 건네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우리는 저마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갑니다. 생계의 무게, 가족 부양의 책임, 노화와 질병의 고통, 그리고 내면의 죄책감과 관계의 상처까지. 숨이 턱에 차오를 정도로 지쳐 있는 우리에게 주님은 아무런 조건 없이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자격이 있어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고생하고 지쳐 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주님은 우리를 품어 안아 쉬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안식을 주겠다고 하신 바로 뒤에, 역설적이게도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하고 말씀하십니다...

[묵상] 2026년 7월 15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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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의 말씀은 신앙인이 가장 경계해야 할 유혹인 ‘교만’과,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여는 열쇠인 ‘겸손’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우리를 깊은 성찰로 초대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아시리아 왕의 안하무인 격인 교만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당시 아시리아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변 민족들을 압도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 승리는 이스라엘의 죄를 정화하기 위해 하느님께서 그들을 잠시 ‘도구’로 쓰신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은 자신의 힘과 지혜로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어리석은 영적 오만을 향해 날카로운 비유를 던지십니다. “도끼가 도끼질하는 사람에게 뽐낼 수 있느냐? 톱이 톱질하는 사람에게 으스댈 수 있느냐?” (이사 10,15). 도끼나 톱은 그것을 쥐고 사용하는 주인이 있을 때만 비로소 가치를 지닙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리는 건강, 지혜, 성공은 모두 하느님이라는 거룩한 ‘손’이 우리를 도구 삼아 베풀어 주신 은총의 산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과 겸손한 이들의 운명이 어떻게 갈리는지 선포하시며 아버지 하느님을 찬미하십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마태 11,25). 여기서 ‘똑똑한 자’는 지식이 많은 이가 아니라, 자신의 아집과 기득권에 갇혀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이들을 뜻합니다. 반면 ‘철부지’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부모의 손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가난한 영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겸손하게 당신을 의지하는 이들에게만 당신 나라의 가장 깊고 아름다운 신비를 열어 보이십니다. 오늘은 위대한 신학자이자 주교이셨던 성 보나벤투라를 기억합니다. 당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혔던 성인이지만, 그의 방에는 수많은 책 대신 오직 십자가 하나만이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학문의 원천을 묻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

[묵상] 2026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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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이 단순히 머리로 아는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참된 믿음이란 우리의 삶을 통째로 돌아서게 만드는 ‘회복과 회개’의 역동적인 힘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 왕 아하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합니다. 아람과 이스라엘이라는 거대한 두 나라가 동맹을 맺고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온 것입니다. 성경은 당시 아하즈 왕과 백성들의 마음이 “숲의 나무들이 바람 앞에 떨듯 흔들렸다”고 묘사하며 그들이 느낀 극심한 두려움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고 위로하시며,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법칙을 선포하십니다.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이사 7,9). 아하즈 왕의 진짜 문제는 눈앞의 강력한 적군이 아니라, 하느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인간적인 권력에 의지하려 했던 ‘불신앙’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삶에 시련의 바람이 불어올 때 세상의 조건에 마음이 흔들리곤 하지만, 하느님이라는 반석 위에 서지 않는 한 그 어떤 세상의 구명보트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셨던 고을들인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혹독하게 꾸짖으십니다. 그곳의 백성들은 주님의 치유와 권능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특권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들의 완고한 삶의 방식을 바꾸는 ‘회개’로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만약 티로나 시돈, 심지어 소돔이 이 기적들을 보았다면 벌써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라며 탄식하십니다. 은총에 익숙해지면 무서운 영적 불감증이 찾아옵니다. 매일 미사와 기도를 바치면서도 삶의 변화가 없다면 우리 또한 이 고을의 백성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진정한 회개는 단순한 후회의 눈물이 아니라, 내 고집을 버리고 하느님을 향해 삶의 방향을 완전히 틀어쥐는 결단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흔들리는 아하즈 왕에게 하느님께서 ...

[묵상] 2026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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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성경 말씀은 안일함과 타성에 젖어 있는 우리의 신앙을 사정없이 흔들어 깨웁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알맹이 없는 화려한 종교 의식을 향해 분노를 터뜨리시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짜 평화를 깨뜨리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선언하십니다. 이 두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적당히 타협하는 신앙'을 버리고, '치열하게 삶으로 살아내는 신앙'을 선택하라고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고발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종교 생활은 겉보기에는 나무랄 데 없이 완벽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제물을 바쳤고, 축제 때마다 성전에 모였으며, 두 손을 높이 들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성전 문을 나선 그들의 일상에는 불의와 착취, 그리고 소외된 이들에 대한 무관심이 가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위선적인 예배를 향해 매몰차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굳기름에는 물렸다. 너희가 팔을 벌려 기도할지라도 나는 너희 앞에서 내 눈을 가려 버리리라. 너희의 손은 피로 가득하다" (이사 1,11-15 참조)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성전 마당만 밟고 가는 형식적인 발걸음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일상 그 자체와 삶의 지향을 원하십니다. "너희 자신을 씻어 깨끗이 하여라. 내 눈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들을 치워 버려라. 악행을 멈추고 선행을 배워라. 공정을 추구하고 억압받는 이를 보살펴라" (이사 1,16-17). 삶의 변화가 수반되지 않는 신앙은 하느님을 감동시키기는커녕 오히려 그분을 모욕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겨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송두리째 깨뜨리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평화의 임금으로 오신 주님께서 왜 ‘칼’을 주러 오셨...

[묵상] 2026년 7월 11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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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유럽의 수호성이자 서방 수도 생활의 아버지이신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입니다. 성인의 유명한 모토인 ‘기도하고 일하라’(Ora et Labora)는 오늘날 분주함과 불안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신앙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거센 반대와 박해 앞에 서 있는 제자들을 향해 거듭해서 강하고 단호한 어조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첫 번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지기 마련이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마태 10,26-27) . 세상은 때로 진실을 왜곡하고, 선하게 살려는 이들을 모함하며, 복음의 가치를 어둠 속에 가두려 합니다. 박해자들의 힘이 너무나 거대해 보여 신앙인들은 때때로 위축되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주님은 선포하십니다. 악의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며, 하느님의 공정과 진리는 반드시 온 세상 밝은 빛 아래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장 눈앞의 불이익이 두려워 진리와 타협하거나 숨기지 말고, 주님의 말씀을 당당하게 삶으로 외치라고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이어 예수님은 우리가 품어야 할 두려움의 대상을 바로잡아 주십니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 (마태 10,28).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세상이 나의 재물이나 건강, 평판, 심지어 목숨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은 고작 우리의 ‘육신’에만 손을 댈 수 있을 뿐, 우리 영혼의 영원한 생명은 결코 건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경계해야 할 것(거룩한 경외심)은 세상의 눈치를 보느라 하느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고 영혼이 메말라가는 일입니다. 주님은 참새 두 마리가 단돈 한 닢에 팔리는 사소한 일도 하느님의 허락 없이...

[묵상] 2026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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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전례의 말씀은 험난한 세상 속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현실적인 지혜와 함께, 우리가 언제나 삶의 닻을 내려야 할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에 대해 들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매우 현실적이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말씀을 건네십니다. “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 (마태 10,16). 주님은 신앙의 길이 결코 평탄한 꽃길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기심과 시기, 물질주의 등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이리 떼 같은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서 말씀대로 순수하게 살아가려는 신앙인은 때로 바보 취급을 당하거나 손해를 보고, 심지어 가장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오해와 미움을 받기도 합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주님이 제시하신 처방전은 바로 이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마태 10,16). 뱀 같은 슬기로움은 악한 세상의 유혹과 음모를 꿰뚫어 보는 통찰력입니다. 무조건 착하기만 해서 세상의 꾐에 쉽게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경계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뜻이며 무엇이 악의 유혹인지 명확히 분별하는 지혜를 뜻합니다. 비둘기 같은 순박함은   세상의 수단에 물들지 않는 마음의 순수함입니다. 세상을 분별하되 나 또한 세상처럼 똑같이 영악해지거나 남을 속이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신뢰하는 깨끗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슬기로움만 추구하다가 영악한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되며, 순박함만 고집하다가 대책 없이 당하는 무기력한 존재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룰 때,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서도 복음의 향기를 풍길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세상이 우리를 법정에 넘기고 채찍질할 때,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이십니다. 박해의 순간에 우리가 해야 할 말을 하느님께서 직접 일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

[묵상] 2026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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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눈물겨운 사랑 고백과 함께, 그 거대한 사랑을 체험한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그 길을 선명히 제시해 줍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기저에는 ‘거저 받은 은총’이라는 따뜻하고도 강렬한 복음의 진리가 흐르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구약 성경을 통틀어 하느님의 부성애(父性愛)가 가장 아름답고도 애절하게 묘사된 대목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소중한 ‘어린아이’로 부르시며, 그들을 키워낸 세월을 추억하십니다.  “이스라엘이 아이였을 때에 나는 그를 사랑하여 나의 그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내가 에프라임에게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내 팔로 안아 주었지만 그들은 내가 자기들의 병을 고쳐 준 줄을 알지 못하였다” (호세 11,1.3). 하느님은 인정 많은 농부처럼 이스라엘의 목에서 멍에를 쳐들어 주셨고, 허리를 굽혀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풍요를 누리게 되자 하느님을 잊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정의대로라면 멸망시켜야 마땅하지만, 하느님은 차마 당신 자녀를 버리지 못하십니다. “내 마음이 미어지고 연민이 북받쳐 오른다. 나는 타오르는 내 분노대로 행동하지 않고 에프라임을 다시는 멸망시키지 않으리라.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호세 11,8-9). 이것이 우리가 믿는 하느님의 본모습입니다. 우리의 배반보다 당신의 사랑이 더 커서, 스스로 당신의 마음을 꺾고 용서하시는 애끓는 사랑, 우리는 모두 이 사랑을 ‘거저’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신앙인이 지녀야 할 가장 순수한 태도를 명령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우리가 누리는 생명과 신앙, 자연 그리고 하느님의 자비 중 우리 힘으로 벌어서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제자들은 하느님의 일을 할 때 대가를 바라거나 세속적인 이익을 챙겨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

[묵상] 2026년 7월 8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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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신앙의 ‘회복’과 ‘새로운 출발’에 대해 강력하게 일깨워 줍니다.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풍요로움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완고해진 이들을 향해 영적인 개간을 촉구하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평범하고 약점 많은 이들을 부르시어 하느님 나라의 강력한 전령으로 파견하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열매가 풍성한 포도나무’에 비유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풍요로워질수록 더 많은 우상의 제단을 만들었고, 땅이 비옥해질수록 석상들을 더욱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축복을 오히려 죄를 짓는 도구로 사용한 것입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그들의 마음이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호세 10,2 참조)라고 진단합니다. 방치해 둔 밭이 시간이 지나면 잡초가 무성해지고 딱딱하게 굳어버리듯, 우리의 마음도 세상의 안락함과 이기심에 길들여지면 ‘묵은 땅’이 되어 버립니다. 말씀의 씨앗이 도저히 뿌리내릴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그래서 예언자는 간절히 외칩니다.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호세 10,12). 신앙의 회복은 내 마음에 굳어진 고집과 이기심의 흙덩이를 주님의 십자가로 갈아엎는 ‘불편한 수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의 밭을 갈아엎은 자리에 주님은 당신의 일꾼들을 세우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열두 제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시며 그들을 파견하십니다. 명단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흥미로운 점이 많습니다. 성격이 불같았던 베드로와 요한, 로마의 앞잡이로 손가락질받던 세리 마태오, 그리고 로마를 무력으로 쫓아내려던 혁명당원 시몬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도저히 한자리에 섞일 수 없고, 배움도 부족하며 허물 많은 평범한 이들이었습니다. 주님은 완벽한 사람들을 골라 쓰신 것이 아니라, 부족한 이들을 불러 당신의 능력으로 완벽하게 채워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에...

[묵상] 2026년 7월 7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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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가 인생의 밭에 무엇을 심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이 얼마나 깊은 자비로 가득 차 있는지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제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잊은 채 헛된 우상에 열중하다 파멸을 향해 가고 있지만, 복음의 예수님은 그런 인간들의 나약함과 방황을 보시며 깊은 연민의 마음을 숨기지 않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호세아 예언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준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여쭈어보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지도자들을 세웠고, 자신들이 가진 금과 은으로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그들의 삶을 한 문장으로 엄중하게 요약하십니다.  “그들이 바람을 심고 회오리바람을 거두리라” (호세 8,7). ‘바람’은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허무한 존재입니다. 하느님이 아닌 재물과 권력, 세상의 쾌락이라는 ‘허무한 바람’을 인생에 심은 결과는 참혹합니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삶을 통째로 날려버릴 파멸의 ‘광풍(狂風)’이 되어 돌아올 뿐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제단을 많이 쌓아 올려도 그 중심에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그곳은 신앙의 자리가 아니라 죄를 짓는 자리가 될 뿐이라는 성경의 경고를 우리는 뼈아프게 새겨야 합니다. 복음에서 사람들은 말못하는 마귀 들린 이를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자 비로소 그 사람이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군중은 이 기적에 찬사를 보냈으나, 마음이 뒤틀린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며 주님의 선행을 악의적으로 왜곡합니다. 말을 못 하게 만드는 마귀는 오늘날 우리 안에도 교묘한 모습으로 찾아옵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입으로 감사의 노래와 찬미의 말, 이웃을 살리는 위로의 말은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게 가로막으면서, 불평과 시기, 남을 깎아내리는 독한 말은 거침없이 쏟아내게 만듭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눈앞의 진리와 선을 보고도 이를 부정하...

[묵상] 2026년 7월 6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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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한 주간을 시작하는 오늘, 성경 말씀은 우리 마음을 설레게 하는 하느님의 뜨거운 사랑 고백과 함께, 그 사랑이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우리 삶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현되는지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바로 하느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그로 인한 생명의 회복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 마치 열렬한 사랑에 빠진 연인처럼 다가오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잊고 세상의 우상인 바알을 쫓아 영적으로 가출해버렸을 때에도, 하느님의 선택은 징벌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호세 2,16.21). 하느님은 우리를 ‘광야’로 데려가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광야는 세상의 화려함도, 의지할 사람도 없는 척박하고 외로운 곳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소음이 사라졌기에 역설적으로 오직 하느님의 목소리만 또렷이 들리는 ‘은총의 자리’가 됩니다. 우리가 인생의 실패나 고독이라는 광야를 지날 때, 그것은 하느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깊이 속삭이기 위해 우리를 따로 부르신 것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생의 가장 깊은 광야를 걷던 두 사람이 예수님을 만납니다.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을 앓으며 사회적으로 소외되었던 여인과, 금방 숨이 넘어간 어린 딸을 둔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군중의 벽을 뚫고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여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굳건한 믿음뿐이었습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마태 9,21). 당시 율법으로는 부정한 여인이 타인에게 손을 대면 상대방도 부정해지지만, 이 여인은 자신의 부정이 예수님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거룩함이 자신의 부정을 깨끗이 씻어줄 것임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

[묵상] 2026년 7월 4일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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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는 오늘, 우리는 ‘회복’과 ‘새로움’이라는 가슴 벅찬 희망의 메시지를 마주합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 인생의 폐허 위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놀라운 재건 사업과 그 은총을 담아낼 ‘새 부대’와 같은 마음가짐에 대해 일깨워 줍니다. 이번 주간 내내 우리가 묵상한 아모스 예언서는 이스라엘의 죄악에 대한 엄중한 심판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예언서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우리는 마침내 하느님의 진심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날에 나는 무너진 다윗의 초막을 일으키리라. 벌어진 곳은 메우고 허물어진 곳을 일으켜서 그것을 옛날처럼 다시 세우리라” (아모 9,11). 하느님의 심판은 우리를 멸망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우리를 진정으로 살리기 위한 아픈 사랑의 매였습니다. 주님은 죄로 황폐해진 우리의 삶과 상처로 허물어진 마음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으시고, 반드시 당신의 손으로 ‘다시 세우시는’ 분입니다. 주님이 개입하시면 절망의 자리마다 생명나무가 자라나고, 메마른 산마다 기쁨의 새 포도주가 흘러넘치는 풍요로운 축제가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제자들은 왜 예수님의 제자들이 자신들이나 바리사이들처럼 단식을 하지 않는지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로 답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마태 9,15). 구약의 단식이 죄에 대한 애통함과 자비를 구하는 간절한 청원이었다면, 이제 구세주 예수님이 우리 곁에 오셨으므로 지금은 슬퍼할 때가 아니라 기뻐할 때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은 무거운 의무감에 짓눌려 억지로 걷는 고행길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영혼의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사랑의 춤을 추는 기쁜 잔치여야 합니다. 이어지는 비유를 통해 주님은 헌 옷에 새 천 조각을 대지 않으며,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축성 없는 낡은 부대에 발효되는 새 포도주를 담으면 결국 부대도 터지고 포도주도 버리게 되기 때문입니다. ...

[묵상] 2026년 7월 3일 성 토마스 사도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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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한 분이자, 우리에게는 ‘의심 많은 제자’로 익숙한 성 토마스 사도 축일입니다. 복음서 속 토마스 사도의 모습은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의 솔직한 자화상일지도 모릅니다. 주님께서 의심의 안개 속에서 헤매던 토마스를 어떻게 당신의 빛으로 이끄셨는지, 그리고 그 여정이 오늘 우리에게 어떤 희망을 주는지 함께 묵상해 봅시다. 다른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기쁨에 겨워 외칠 때,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는 냉정하게 선언합니다.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요한 20,25). 우리는 흔히 토마스를 불신앙의 대명사로 여기며 쉽게 비난하곤 하지만, 그의 의심 안에는 사실 ‘진짜’ 주님을 만나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숨어 있었습니다. 남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내 삶의 현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시련 앞에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이 계신데 왜 이런 일이 생기는가?'라는 의심은 하느님을 향한 반역이 아니라, 더 깊은 신앙으로 나아가기 위해 겪어야 하는 영혼의 성장통일 수 있습니다. 여드레 뒤, 예수님께서는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토마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요한 20,27). 주님은 토마스의 의심을 꾸짖거나 외면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가장 아프고 부끄러운 부활의 상처를 기꺼이 내어주십니다. 그 자비로운 사랑 앞에서 토마스는 더 이상 증거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자리에 엎드려 성경 전체를 통틀어 가장 완벽한 신앙 고백을 터뜨립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 20,28). 이 고백은 머리로 깨달은 지식의 결과가 아니라, 자신의 나약함까지 있는 그대로 ...

[묵상] 2026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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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빠져나올 수도 없는 막막한 ‘영적 중풍’ 상태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처럼, 침상에 누운 채 타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우리 영혼을 덮쳐올 때가 있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무력감과 죄책감에 짓눌린 우리를 향해, 가장 따뜻하면서도 강력한 치유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이들은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 개인의 믿음을 확인하시기 이전에, 그를 메고 온 이들의 정성과 굳건한 신뢰를 먼저 보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태 9,2)라고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해야 하는 소중한 이유입니다. 내 믿음이 약해져 스스로 주님께 걸어 나갈 힘조차 없을 때, 곁에서 나를 위해 눈물 흘려주는 구역 식구들의 기도와 가족들의 지향 그리고 공동체의 연대가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서로의 침상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는 사랑의 동반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육신의 치유만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첫 일성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마태 9,2).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굳어버린 몸보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책감’과 ‘소외감’의 응어리를 먼저 꿰뚫어 보셨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중풍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여겨졌기에, 이 병자는 육체의 고통보다 ‘나는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지독한 영적 고독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근원적인 아픔의 사슬을 먼저 끊어주십니다. “얘야” 라는 다정한 부르심 속에는 이미 모든 용서와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과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회복될 때, 비로소 참된 치유가 시작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 역시 세상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