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목요일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내 힘으로는 도저히 움직일 수도, 스스로의 힘만으로는 빠져나올 수도 없는 막막한 ‘영적 중풍’ 상태를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중풍 병자처럼, 침상에 누운 채 타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이 우리 영혼을 덮쳐올 때가 있지요.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그런 무력감과 죄책감에 짓눌린 우리를 향해, 가장 따뜻하면서도 강력한 치유의 말씀을 건네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 할 이들은 중풍 병자를 평상에 뉘어 예수님께 데려온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자 개인의 믿음을 확인하시기 이전에, 그를 메고 온 이들의 정성과 굳건한 신뢰를 먼저 보셨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태 9,2)라고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도해야 하는 소중한 이유입니다. 내 믿음이 약해져 스스로 주님께 걸어 나갈 힘조차 없을 때, 곁에서 나를 위해 눈물 흘려주는 구역 식구들의 기도와 가족들의 지향 그리고 공동체의 연대가 우리를 예수님 앞으로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서로의 침상을 기꺼이 함께 짊어지는 사랑의 동반자들입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육신의 치유만을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첫 일성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습니다. “얘야, 용기를 내어라.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마태 9,2). 예수님께서는 병자의 굳어버린 몸보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죄책감’과 ‘소외감’의 응어리를 먼저 꿰뚫어 보셨습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서 중풍은 하느님의 벌이라고 여겨졌기에, 이 병자는 육체의 고통보다 ‘나는 하느님께 버림받았다’는 지독한 영적 고독에 시달렸을 것입니다. 주님은 그 근원적인 아픔의 사슬을 먼저 끊어주십니다. “얘야”라는 다정한 부르심 속에는 이미 모든 용서와 자비가 담겨 있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과의 관계가 본질적으로 회복될 때, 비로소 참된 치유가 시작됩니다.
오늘 제1독서의 아모스 예언자 역시 세상의 시선으로는 예언자가 되기에 턱없이 무력한 배경을 가졌던 인물입니다. 그는 전문적인 예언자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그저 가축을 키우며 돌무화과나무를 가꾸던 평범한 시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아모 7,15) 하시며 그를 붙잡으시자, 그는 권력자 아마츠야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히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가 쓰시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 출중해서가 아닙니다. 비록 나는 약하고 부족할지라도, 주님께서 내 죄를 용서하시고 손을 잡아 이끄실 때 우리는 아모스처럼 세상의 거센 풍파에 맞서 걸어 나갈 참된 용기를 얻게 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을 살펴봅시다. 나는 지금 미움, 과거의 상처 혹은 물질에 대한 집착에 묶여 영적인 중풍 환자처럼 꼼짝달싹 못 하고 누워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내 주변에서 영적으로 지쳐 신음하는 이웃의 침상을 함께 메어줄 마음의 여유를 품고 있습니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의심하며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예수님께서는 “일어나 네 평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거라”하고 명령하셨고 병자는 즉시 일어나 집으로 걸어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에게도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용서했다. 그러니 과거의 어두운 침상에 계속 누워 있지 말고, 그것을 훌훌 털고 일어나 네 삶의 자리로 당당히 걸어가거라.”
오늘 하루, 우리를 옥죄고 있는 죄책감과 무력감의 끈을 주님의 자비로운 말씀으로 풀어냅시다. 그리고 그 기쁨의 힘으로 내 곁에서 지쳐 누워 있는 형제들에게 따뜻한 위로의 손길을 건네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용기를 주시는 주님, 저희가 내면의 나약함과 죄의 무게 때문에 스스로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멈춰 서 있을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오늘 저희를 ‘얘야’ 하고 불러주시는 그 자비로운 음성에 힘입어 다시 일어나게 하소서. 저희 마음의 굳어버린 자리를 치유해 주시어, 오늘 저희가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기쁘게 하느님의 사랑을 살아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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