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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6년 5월 1일 부활 제4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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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진리, 생명 오늘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과 그로부터 샘솟는 희망에 대해 묵상합니다. 막막한 현실 속에서 길을 잃었다고 느낄 때, 하느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설교와 예수님의 친근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를 깨워 주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간절하게 선포합니다. 이스라엘 조상들에게 하신 하느님의 약속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실현되었다는 기쁜 소식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무덤에 가두면 모든 것이 끝날 줄 알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는 과거의 기록에 머무는 사건이 아닙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사도 13,33)라는 말씀처럼, 부활하신 주님은 오늘 우리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을 낳고 계십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어떤 어둠 속에서도 반드시 이루어짐을 믿으십시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수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 담화의 시작을 전합니다. 스승의 떠남을 예감한 제자들의 마음은 몹시 불안하고 산란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가장 먼저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요한 14,1) 하고 다독이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내일에 대한 불안과 내가 가는 이 길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한 처소를 마련하러 가신다고 약속하시며,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고향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잠시 나그네 길을 걷고 있지만, 우리를 기다리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줍니다. 토마스 사도는 우리를 대표하여 묻습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요한 14,5). 이에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명확한 해답을 주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예수님은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주는 안내서를...

[묵상] 2026년 4월 30일 부활 제4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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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겸손과 순명 오늘 우리는 사도 바오로가 행한 첫 번째 공식 설교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직후의 말씀을 함께 듣습니다. 이 두 말씀은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인간의 겸손과 순명을 통해 완성된다'는 소중한 진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요약하며 인간의 업적이 아닌 하느님의 선택과 약속을 강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보잘것없는 노예 민족을 선택하셨고, 그들의 끊임없는 불평 속에서도 광야의 시간을 참아주시며 결국 약속하신 구원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 인생 역시 내가 주인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느님의 세심한 계획 아래 이끌려가는 거대한 구원 역사의 소중한 한 페이지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친히 종의 모습이 되어 제자들의 발을 닦아주신 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요한 13,16). 우리는 흔히 세상 속에서 대접받고 높아지기를 원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이의 진짜 권위는 먼저 허리를 굽혀 상대방의 고단함을 닦아주는 겸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낮아질 때 비로소 세상은 우리 안에서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당신의 이름을 걸고 세상에 나가는 대사로 보증해 주십니다. 이는 엄청난 특권인 동시에, 우리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정직한 행동이 사람들이 하느님을 만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대사로서 겸손하게 행동할 때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문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은 머리로 아는 것에 그치지 않고 발로 뛰며 손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요한 13,17)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내가 파견된 가정과 직장에서 주님의 대사로서 당당하면서도 겸손하게 살아갑시다. 우리의 작은 섬김이 누군가에게는 하느님을 만나는 기적의 순간이 될 것입니다. ...

[묵상] 2026년 4월 29일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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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모험 오늘은 이탈리아의 수호성인이자 교회의 학자이신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녀는 혼란스러웠던 중세 교회 안에서 교황님께 직언을 서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뜨거운 기도로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했던 사랑의 불꽃 같은 분이었습니다. 오늘 전례는 성녀의 삶처럼 주님의 빛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는 이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요한 12,44). 스스로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종교적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미움, 절망, 탐욕과 같은 내 삶의 어두운 구석구석에 주님의 빛을 모셔 들이는 일입니다. 빛 속에 머무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습니다. 성녀 가타리나가 험난한 시대의 풍랑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나아갈 수 있었던 비결은 오직 주님의 빛만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안티오키아 교회가 바르나바와 사울을 선교사로 파견하는 장면을 전합니다. 금식하며 기도하던 공동체는 “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 ” (사도 12,2)라는 성령의 음성에 순명했습니다. 교회는 고여 있는 물이 아니라, 성령의 바람을 타고 끊임없이 세상 밖으로 나아가는 배와 같습니다.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자신들에게 꼭 필요한 소중한 지도자들을 기꺼이 내어놓았듯이, 하느님의 일을 위해 내 것을 내려놓는 용기야말로 복음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는 강력한 원동력이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가르침이 개인적인 의견이 아니라 아버지가 주신 명령이며, 그 명령이 곧 영원한 생명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의 계명을 나를 구속하는 무거운 짐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빛이 식물에게 생명이 되듯, 주님의 말씀은 우리 영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에너지입니다. 성녀 가타리나는 "하느님께 맛을 들인 사람은 온...

[묵상] 2026년 4월 28일 부활 제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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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오늘 우리는 교회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어인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마주합니다. 안티오키아에서 처음 사용된 이 명칭은 단순히 종교적인 분류를 넘어, 그들의 삶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아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영광스러운 칭호였습니다. 스테파노의 일로 시작된 박해로 인해 신자들은 정든 곳을 떠나 키프로스와 안티오키아까지 흩어져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유다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지만, 점차 그리스인들에게도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난은 신자들을 위축시키기보다 오히려 선교의 지평을 넓히는 기회가 되었는데, 이는 바로 주님의 손이 그들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닥친 예기치 못한 시련이 우리를 낯선 환경으로 몰아넣을 때, 그곳이 바로 주님의 손길 안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선교의 현장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안티오키아에 바르나바를 파견했습니다. 성경은 그를 "착한 사람이며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 (사도 11,24)이라고 묘사합니다. 그는 신자들을 보며 진심으로 기뻐했고, 굳센 마음으로 주님께 계속 충성하라며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특히 그는 과거의 박해자였던 사울(바오로)을 찾아내어 공동체로 이끄는 포용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처럼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세워주는 격려자가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메시아인지 분명히 밝히라며 다그쳤지만, 주님은 그들이 믿지 않는 이유가 그분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 (요한 10,27). 목자와 양이 매일 시간을 같이 보내며 서로의 음성에 익숙해지듯, 우리도 기도와 말씀을 통해 주님의 주파수에 맞추어야 합니다. 세상의 수많은 유혹 속에서 주님의 세밀한 음성을 가려내는 분별력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능력입니다.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가...

[묵상] 2026년 4월 27일 부활 제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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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타리를 넘는 사랑 어제 성소 주일의 여운을 이어가며,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착한 목자 담화를 다시 한번 깊이 묵상하게 됩니다. 오늘 전례는 목자가 양들을 위해 어떻게 자신을 내어주는지,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가 세운 편견의 울타리를 넘어 어떻게 세상 끝까지 뻗어 나가는지를 보여줍니다. 첫째, 삯꾼의 계산이 아닌 목자의 희생을 기억합시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착한 목자'라고 부르시며 삯꾼과 대비시키십니다. 삯꾼은 오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이리가 나타나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나지만, 착한 목자는 반대의 모습은 보입니다. "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 (요한 10,11). 우리는 세상 속에서 '네가 가치가 있을 때만 너를 돌보겠다'는 조건부 사랑과 계산적인 논리를 수없이 접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가장 연약하고 죄 속에 있을 때, 심지어 절망과 죽음이 우리를 덮칠 때조차 우리를 위해 당신의 전부를 던지셨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바로 목숨을 건 사랑이 거둔 위대한 승리입니다. 둘째, 우리 마음의 울타리를 허물고 하느님의 넓은 시선을 가집시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매우 중요한 선언을 하십니다. “ 그러나 나에게는 이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도 있다.  나는 그들도 데려와야 한다 ” (요한 10,16). 주님의 사랑은 특정 민족이나 이미 믿고 있는 우리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직 당신을 모르는 이들, 상처받아 떠난 이들, 심지어 우리와 생각이 다른 이들까지도 모두 '내 양'이라 부르시며 찾아 나서십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가 이방인의 집에서 음식을 먹었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았을 때 깨달았던 진리도 이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방인들에게도 회개의 길을 열어주셨으며 결코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내가 세운 심판의 울타리를 허물고, 하느님의 넓은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는 데 있습니다. 셋째, 목자의 목소리를 따르며...

[묵상] 2026년 4월 25일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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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패를 이겨내는 신앙 오늘은 네 명의 복음사가 중 한 분인 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마르코 성인은 우리에게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를 남겨주신 분이며, 오늘 복음의 명령대로 온 세상에 가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삶으로 완수한 분입니다. 특별히 오늘 우리는 마르코 성인의 삶을 통해 '실패를 이겨내는 신앙'에 대해 묵상하고자 합니다. 성경 기록을 보면 마르코는 처음부터 완벽한 선교사는 아니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1차 전교 여행에 동행했다가 힘들고 두려워 도중에 돌아가 버린 전력이 있어, 한때 공동체의 골칫거리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 사도는 그를 "나의 아들 마르코" (1베드 5,13)라고 부르며 아꼈고, 실패했던 청년 마르코는 그 곁에서 겸손히 다시 시작하여 결국 바오로 사도에게도 큰 위로가 되는 조력자로 성장했습니다. 우리 역시 신앙의 위기를 겪거나 도망치고 싶을 때가 있지만, 주님은 마르코에게 그러하셨듯 우리에게도 늘 두 번째 기회를 허락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인 "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 (마르 16,20)는 말씀처럼, 복음 선포는 제자들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일하셨기 때문입니다. 마르코 복음이 예수님의 가르침보다 행동과 기적을 강조하듯,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 발걸음을 내딛는 그 현장에서 우리와 함께 땀 흘리시는 분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마르코를 곁에 두고 " 여러분은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대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대적하시고  겸손한 이들에게는 은총을 베푸십니다 " (1베드 5,5)라고 강조했습니다. 마르코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묵묵히 기록자의 길을 걸었을 때 위대한 복음사가가 되었듯이, 우리도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의 옷을 입을 때...

[묵상] 2026년 4월 24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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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심과 성체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극적인 두 사건을 마주합니다. 하나는 교회의 박해자였던 사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사도 바오로로 거듭나는 회심의 현장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주겠다고 선포하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입니다. 첫째, 때로는 빛에 눈이 멀어야 진정한 진리가 보입니다. 사울은 기고만장하여 그리스도인들을 잡아 가두려 다마스쿠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을 위해 옳은 일을 한다고 굳게 믿었지만, 강렬한 빛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순간 말에서 거꾸러지고 눈이 멀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사울은 눈이 멀었을 때 비로소 자기 내면의 어둠을 보았고, 주님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우리도 때로 내 고집과 가치관이 너무 뚜렷해서 곁에 계신 주님을 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장애물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시선을 돌리게 하려는 은총의 초대입니다. 둘째, 주님은 우리와 온전히 하나 되어 계십니다. 예수님은 사울에게 "왜 내 제자들을 괴롭히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도 9,4)라고 물으셨습니다. 이는 주님과 우리 믿는 이들이 떼려야 뗄 수 없는 하나의 몸임을 뜻합니다. 여러분이 아플 때 주님도 아파하시고,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풀 때 주님도 기뻐하십니다. 사울은 이 짧은 대화를 통해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놀라운 신비를 깨달았습니다. 우리 곁의 형제자매를 대하는 태도가 곧 주님을 대하는 태도임을 잊지 맙시다. 셋째, 주님을 먹어야 우리는 진정으로 살 수 있습니다. 유다인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요한 6,52)라며 논란을 벌였으나, 이는 여전히 육적인 생각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더욱 강하게 생명의 신비를 선포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요한 6,...

[묵상] 2026년 4월 23일 부활 제3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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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생명의 약속 오늘 우리는 광야의 길 위에서 일어난 아름다운 만남과 우리 영혼의 허기를 영원히 채워주시는 예수님의 약속을 함께 묵상합니다. 이 두 이야기는 신앙이란 단순히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이끌리고 그 이끄심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역동적인 과정임을 잘 보여줍니다. 첫째, 성령의 ‘깜짝 초대’에 응답하십시오. 오늘 제1독서에서 성령께서는 필립보 사도에게 " 일어나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을 따라 남쪽으로 가거라.  그것은 외딴길이다 " (사도 8,26)라고 명령하십니다. 인적 드문 광야로 가라는 다소 황당한 지시였지만, 필립보는 망설임 없이 순명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느님을 갈망하며 성경을 읽던 에티오피아 여왕의 내시를 만나게 됩니다. 우리 삶에도 때로 이해할 수 없는 광야 같은 순간이 찾아옵니다. 계획이 틀어지거나 외로운 길로 내몰리는 듯한 그때, 하느님은 외딴길에서 누군가를 구원하시거나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한 놀라운 일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일상에 불쑥 찾아오는 성령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둘째,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이끄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 (요한 6,44)라는 놀라운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성당에 발을 들이고 기도를 시작하는 것이 온전히 내 의지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먼저 건드리시고 이끌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내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초대이며, 우리는 그 초대에 응답할 뿐입니다. 에티오피아 내시가 필립보의 설명을 듣고 " 여기에 물이 있습니다.  내가 세례를 받는 데에 무슨 장애가 있겠습니까? " (사도 8,36)라며 즉각 반응했듯이, 우리도 주님의 이끄심 앞에 마음의 빗장을 활짝 풀어야 합니다. 셋째, 주님은 우리 존재의 근원적 갈증을 채우는 살아 있는 빵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묵상] 2026년 4월 22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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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해를 뛰어넘는 사랑의 손길 오늘 우리는 초대교회가 마주했던 거센 박해의 이야기와 불안한 세상 속에서도 우리를 결코 놓지 않으시겠다는 예수님의 강력한 약속을 함께 듣습니다. 이 두 메시지는 하나로 연결되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어떤 시련을 겪든 우리를 구원하시고 당신의 도구로 쓰신다는 진리를 전해줍니다. 첫째, 박해는 복음의 씨앗을 날리는 바람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에 닥친 큰 박해로 신자들은 정든 집을 떠나 흩어져야 했습니다. 인간의 눈에는 재난이자 위기였으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랐습니다.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 8,4)라는 말씀처럼, 좁은 울타리에 갇혀 있던 복음이 박해라는 바람을 타고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닥치는 갑작스러운 변화나 시련 역시, 하느님께서 새로운 복음의 꽃을 피우기 위해 마련하신 계획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를 하나도 잃지 않으시려는 하느님의 거룩한 고집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당신의 사명을 다음과 같이 명확히 밝히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요한 6,39). 우리는 살면서 건강이나 재물, 때로는 믿음마저 잃어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순간을 맞이하지만, 주님은 결코 우리를 잃어버리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길을 잃고 헤맬 때 먼저 찾아오시며 끝까지 우리 손을 놓지 않으시는 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십니다. 셋째,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는 환경을 뛰어넘는 기쁨이 자리합니다. 필립보가 소외된 땅 사마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 (사도 8,8)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부활의 기쁨은 상황이 완벽해서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박해와 이별의 아픔 속에 있더라도, "주님이 나를 잃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의 삶터는 비로소 기쁨이 가득한 성읍으로 변하게 됩니다. ...

[묵상] 2026년 4월 21일 부활 제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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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의 빵 오늘 우리는 성경에서 가장 비극적이면서도 가장 영광스러운 두 장면을 동시에 마주합니다. 바로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죽음과, 당신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선언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두 이야기는 '우리가 무엇을 바라보고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신앙의 본질을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하늘을 우러러보는 시선을 가져야 합니다. 스테파노 성인은 돌에 맞아 죽어가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도 땅을 내려다보며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그가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사도 7,55 참조)고 전합니다. 그는 구름 너머 하느님의 영광과 그 오른편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우리 삶의 문제가 끝이 보이지 않을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제 자체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는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생명의 빵을 갈망해야 합니다. 군중은 조상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던 것처럼 눈앞에 보이는 기적만을 요구하며 배부른 배에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 (요한 6,35). 세상이 주는 인정이나 재물은 우리를 잠시 달랠 뿐이지만, 오직 생명의 빵이신 주님만이 우리 영혼의 근원적인 갈증을 해소하고 우리를 충만하게 하십니다. 셋째로, 이 신앙은 용서를 통해 완성됩니다. 스테파노 성인은 죽음의 순간에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60)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도덕적 결심이 아니라, 주님과 하나 된 사람에게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사랑의 향기입니다. 이 용서의 기도는 훗날 바오로 사도가 되는 사울의 마음속에 부활의 씨앗으로 심겨졌을 것입니다. 성경은 스테파노 성인의 죽음을 "잠들었다" 고 표현합니다. 주님을 생명의 빵으로 모신 이에...

[묵상] 2026년 4월 20일 부활 제3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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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썩지 않는 양식 부활 제3주간을 시작하며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직후의 상황을 전합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찾아 호수 건너편까지 쫓아올 정도로 열정적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의 마음속 깊은 동기를 꿰뚫어 보시고 일침을 가하십니다. 예수님은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요한 6,26). 군중은 빵이라는 물질적 결과에만 매달렸으나, 기적의 본질은 빵 자체가 아니라 그 빵을 나누어 주시는 분이 바로 생명의 주님이시라는 표징에 있습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 그분 자체보다 그분이 주시는 성공이나 건강 같은 부수적인 복락에만 마음을 뺏기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썩어 없어질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영적 양식을 갈망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군중의 물음에 예수님은 명확히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요한 6,29). 우리는 자꾸 내 힘으로 무언가를 해내서 하느님께 점수를 따려 하지만, 진정한 신앙의 정점은 나를 내려놓고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고 그분과 일치할 때, 우리의 평범한 일상은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오늘 제1독서에 등장하는 첫 순교자 스테파노 성인은 이러한 믿음의 힘을 잘 보여줍니다. 그가 모함을 받아 의회에 섰을 때, 성경은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최고 의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스테파노를 유심히 바라보았는데,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처럼 보였다" (사도 6,15).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그의 얼굴이 빛났던 이유는 그가 썩지 않는 양식인 부활하신 주님으로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내면이 주님의 사랑으로 채워진 사람은 고통 중에도 평화로운 천사의 얼굴을 갖게 됩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을 얻기 위해 주님을 찾고 있습니까? 혹시 어제의 만족에만 머물러 또 다른 세속적인 욕심만을 구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