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5월 26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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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함의 완성은 기쁨 오늘은 '기쁨의 성인'이라 불리는 성 필립보 네리 사제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는 16세기 로마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의 다정한 친구가 되어주며, 엄격하고 딱딱한 형식이 아니라 유머와 웃음이 넘치는 신앙의 참맛을 전파했습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을 따를 때 얻게 되는 거룩함과 보상이 결코 무거운 짐이 아님을 가르쳐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우리에게 강한 권고를 던집니다.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1베드 1,15). 흔히 '거룩함'이라고 하면 세상과 단절된 채 엄숙한 표정으로 기도만 하는 모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성 필립보 네리는 거룩함이란 '하느님 안에서 누리는 일상의 기쁨'임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이들과 천진하게 놀아주고 익살스러운 장난을 치면서도, 마음의 중심은 늘 하느님을 향해 있었습니다. 참된 거룩함은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네는 따뜻한 미소와 친절한 말 한마디 속에 녹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재산 때문에 슬퍼하며 주님을 떠나갔던 부자 청년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위해 무언가를 기꺼이 포기한 이들에게 현세에서의 백 배 보상과 박해 그리고 내세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십니다. 여기서 백 배의 보상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를 뜻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선택함으로써 얻게 되는 새로운 영적 가족, 깊은 내면의 평화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풍요를 의미합니다. 비록 세상의 가치관과 다르게 살기에 박해가 뒤따를지라도, 주님 안에 머무는 기쁨은 그 박해의 무게보다 훨씬 더 큽니다. 예수님은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고 경고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의로움이나 기득권에 ...

[묵상] 2026년 5월 25일 교회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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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아래에서 맺어진 새로운 가족 오늘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거룩한 위탁의 장면을 마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홀로 남겨질 어머니와 제자를 바라보시며, 인류 구원을 위한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남기십니다. 성모님은 이제 '교회의 어머니'로 새로 태어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모님을 향해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요한 19,26)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어머니'가 아닌 '여인'이라 부르신 것은 단순히 거리를 두는 표현이 아닙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뱀의 머리를 짓밟을 여인의 후손을 약속하셨던 그 예언이, 지금 이 십자가 아래서 완성되고 있음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성모님은 이제 예수님 개인의 어머니를 넘어, 예수님의 몸인 교회의 어머니가 되셨습니다. 아드님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꿰찌르는 고통 속에서도, 성모님은 그 아픔을 온 인류를 품는 해산의 고통으로 승화시키셨습니다. 성모님을 우리 마음의 집에 기쁘게 모셔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 요한에게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라고 말씀하셨고, 성경은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분을 자기 집에 모셨다" (요한 19,27)라고 기록합니다. 요한은 베드로처럼 앞장서지는 않았지만, 끝까지 십자가 곁을 지켰던 신의 있는 제자로서 교회를 대표하여 성모님을 어머니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는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 주님이 남기신 마지막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모님을 우리 마음의 집에 모실 때, 교회는 비로소 차가운 제도를 넘어 따뜻한 어머니의 품을 갖춘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성모님은 기도로 교회를 지탱하시는 분입니다. 성령 강림 직전, 제자들이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모여 있을 때 성모님은 그들 한가운데 계셨습니다(사도 1,14 참조). 성모님은 흔들리는 제자들의 신앙을 기도로 붙들어 주셨고, 성령의 불길이 그들에게 ...

[묵상] 2026년 5월 23일 부활 제7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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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멈추지 않는 복음 드디어 부활 시기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도행전과 요한 복음이 각각 어떻게 마무리를 짓는지 목격합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가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복음을 전하는 장면으로 끝을 맺고, 요한 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을 다 기록하기엔 세상도 부족하다는 고백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 두 열린 결말은 이제 복음의 역사를 이어갈 주인공이 바로 우리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마침내 로마에 도착합니다. 비록 죄수의 몸으로 쇠사슬에 묶여 가택 연금 중이었지만, 성경은 놀라운 표현을 씁니다. "그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담대히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하여 가르쳤다" (사도 28,31). 바오로의 몸은 비록 묶여 있었으나,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말씀은 자유로웠으며 오히려 그 제약 속에서도 찾아오는 모든 이를 환대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 역시 질병, 경제적 어려움 혹은 관계의 단절이라는 인생의 쇠사슬에 묶일 때가 있지만, 그 상황조차 하느님의 일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처한 그 좁은 자리에서도 주님을 찬미하고 사랑을 실천한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길이 됩니다. 복음에서 베드로는 곁에 있는 동료 제자인 요한의 운명을 궁금해하며 묻습니다.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한 21,21).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 (요한 21,22). 우리는 자꾸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며 '왜 나만 이런 십자가를 져야 하지?'라고 불평하곤 하지만, 주님은 각자에게 맞는 고유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요한은 오래 살아 주님의 사랑을 기록하는 사명을, 베드로는 죽음으로써 주님을 증언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남의 길이 아니라, 오늘 나에게 건네시는 "너는 나를 따라라" 는 주님의 초대입니다. 복음의 마지막 구절은...

[묵상] 2026년 5월 22일 부활 제7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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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응답 성령 강림 대축일을 이틀 앞둔 오늘, 전례는 우리 신앙의 가장 본질적인 질문 앞에 우리를 세웁니다. 바로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주님의 물음입니다. 이 물음은 배반의 상처를 안고 있던 베드로를 치유하고, 그를 교회의 반석으로 다시 세우는 생명의 부름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총독 페스투스는 아그리파스 임금에게 바오로의 재판에 관해 보고합니다. 세상의 눈에 바오로의 주장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이미 죽은 예수라는 이가 살아 있다고 바오로가 주장하는 것” (사도 25,19 참조)이 재판의 쟁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믿는 세상의 논리에서 '살아 있는 예수'는 한낱 논쟁거리일 뿐이지만, 바오로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감옥과 재판조차 두렵지 않게 만드는 실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역시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증언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증거는 화려한 말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흐르는 부활의 기쁨과 사랑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숯불을 피워놓으시고 베드로에게 물으십니다. 이 숯불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던 그 아픈 밤의 기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는 대신, 세 번의 질문을 통해 그가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죄책감을 씻어내 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 21,16)라는 물음에 베드로는 이제 더 이상 자신만만하게 장담하지 못합니다. 대신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요한 21,15)라고 고백하며, 자신의 의지가 아닌 주님의 아심에 모든 것을 맡깁니다. 주님은 이 겸손한 사랑의 고백 위에 당신의 소중한 양들을 맡기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뛰어난 신학 지식이나 조직 관리 능력을 묻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사랑 하나만을 확인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고 이웃을 돌보는 유일한 동기는 오직 주님을 향한 사랑이어야 합니다. 주님은 베드로가 장차 겪게 될 순교를 예고하시며,...

[묵상] 2026년 5월 21일 부활 제7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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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치를 향한 기도 성령 강림 대축일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오늘, 전례는 우리에게 두 가지 강렬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하나는 어떤 위기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사도 바오로의 담대한 증언이며, 다른 하나는 모든 믿는 이들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는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목숨이 위태로운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 속에서도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앞에 당당히 서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안위보다 신앙의 본질을 먼저 생각하며, 부활을 믿지 않는 이들 앞에서 죽은 이들의 부활에 대한 희망을 선포합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는 바오로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너는 예루살렘에서 나를 위하여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 (사도 23,11). 주님은 바오로를 고난에서 즉시 빼내 주신 것이 아니라, 곁에 서 계심으로써 더 큰 사명의 길로 나아갈 용기를 주셨습니다. 우리 인생의 예루살렘과 같은 고난의 자리에서 주님을 증언할 때, 주님은 우리를 더 넓은 세상인 로마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대사제 기도는 절정에 달합니다. 놀라운 점은 주님의 기도가 당시의 제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는 이들만이 아니라 이들의 말을 듣고 저를 믿는 이들을 위해서도 빕니다" (요한 17,20)라는 말씀처럼 오늘날 우리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가장 큰 소망은 바로 일치입니다. 이 일치는 단순히 의견을 맞추는 모임을 넘어,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님 사이에 흐르는 지고한 사랑이 우리 안에도 흐르게 해달라는 간절한 요청입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며 하나 될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발견하게 될 것이며, 이 일치야말로 가장 강력한 선교가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도 나누어 주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영광은 지상의 화려함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 안에 머무는 은총을 뜻합니다. 우리가 공동체 안...

[묵상] 2026년 5월 20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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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치와 거룩함으로의 초대 성령 강림을 며칠 앞둔 오늘, 전례의 분위기는 비장하면서도 뜨겁습니다. 어제에 이어 사도 바오로의 눈물 어린 고별 설교가 마무리되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남겨질 제자들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니다. 이 두 장면은 모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길에 소중한 이들을 맡기는 신뢰라는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원로들과 마지막 포옹을 나눕니다. 다시는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는 슬픔에 모두가 목을 놓아 울지만, 바오로는 인간적인 정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그는 공동체를 위협할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라고 당부하며, 결론적으로 "이제 나는 하느님과 그분 은총의 말씀에 여러분을 맡깁니다" (사도 20,32)라고 선언합니다. 사람의 보살핌에는 한계가 있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움직이며 사람을 성장시키고 하늘의 상속 재산을 나누어 줄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은 그를 주님의 말씀 안에 머물게 하고, 하느님의 손에 온전히 의탁하는 것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일치와 기쁨 그리고 거룩함을 청하십니다. 주님은 가장 먼저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요한 17,11)라고 기도하시며, 우리가 성부와 성자의 사랑의 신비 안에 머물기를 바라십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거친 세상 한복판에서 "악에서 구하소서" 라는 주님의 기도에 힘입어 복음의 향기를 내뿜으며 살아야 합니다. 진정한 거룩함이란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구별됨'이며, 우리가 이 진리 안에 머물 때 주님의 충만한 기쁨이 우리 안에도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는 걱정과 불안으로 소중한 이들을 옥죄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은총에 그들을 기쁘게 맡기고 있습니까? 바오로 사도와 에페소 원로들이 눈물 속에서도 서로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