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026의 게시물 표시

[묵상] 2026년 07월 01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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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에게 가짜 평화의 안주함을 깨뜨리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생명'과 '공정'의 길을 선택하라고 강력하게 도전합니다. 형식적인 종교 행위에 머물렀던 이스라엘을 향한 아모스 예언자의 준엄한 꾸짖음과, 한 인간의 구원보다 자신의 재산을 더 아까워했던 가다라인들의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비추어 보게 합니다. 아모스 예언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겉으로 보기엔 매우 열성적인 신앙인이었습니다. 화려한 축제를 열고 거창한 제물을 바치며 아름다운 성가를 불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일상 이면에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착취와 불의가 가득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위선적인 예배를 향해 진노하시며 이렇게 선포하십니다. " 나는 너희의 축제들을 싫어한다.  배척한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 " (아모 5,21.24). 신앙의 참된 가치는 성전 안의 예식이 아니라, 성전 문을 나선 우리의 일상에서 정의와 사랑이 실천될 때 비로소 증명됩니다. 삶이 따르지 않는 신앙은 하느님을 감동시킬 수 없으며, 세상을 속이는 허무한 위선일 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귀에게 사로잡혀 인간다움을 잃어버린 두 사람을 해방시켜 주십니다. 그런데 이 기적을 목격한 가다라인들의 반응은 충격적입니다. 그들은 마귀 들렸던 이웃이 온전해진 기쁨보다, 돼지 이천 마리라는 막대한 재산이 사라진 것에 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마태 8,34) 간청합니다. 그들에게는 고통받던 이웃의 구원보다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안정이 더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 역시 '탐욕'이라는 또 다른 마귀에 굳게 붙들려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복음 속 돼지 떼와 제1독서의 위선적인 제물은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둘 다 하느님이나 이웃의 생명보다 '내가 쥐고 있는 이익과...

[묵상] 2026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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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믿음 오늘은 어제 대축일을 지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뒤를 이어, 네로 황제의 박해 아래 로마에서 장렬히 순교한 '로마 교회의 첫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 나타난 호수의 풍랑과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가 전하는 준엄한 경고는, 우리가 마주하는 시련의 참된 의미와 그 이면에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깊이 묵상하게 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에 올랐으나 곧 거센 풍랑을 마주합니다. 배 안으로 물이 들이쳐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한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배 뒤편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계십니다. 겁에 질린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며 외칩니다.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되었습니다" (마태 8,25). 이 배는 곧 우리의 인생이자 교회를 상징합니다. 살아가며 건강의 위기나 경제적 고난, 관계의 균열이라는 거친 파도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는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시는가?'라며 원망 섞인 기도를 드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주님이 잠들어 계신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분은 늘 우리 삶의 배 안에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예수님께서는 풍랑을 잠재우시기 전, 먼저 제자들의 약한 믿음을 지적하십니다.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마태 8,26). 예수님이 곁에 계심에도 두려움에 떤다는 것은, 주님의 현존보다 눈앞의 파도를 더 크게 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곧 파도보다 더 크신 분이며 그분이 계신 배는 결코 침몰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잠시 망각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는 로마의 첫 순교자들은 이 진리를 생명으로 증언한 분들입니다. 그들은 박해라는 광풍 속에서도 주님이 함께 계심을 굳게 믿었기에, 죽음의 파도를 넘어 영원한 생명의 항구로 당당히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1독서에서 아모스 예언자는 하느님의 엄중한 경고를 사자의 포효에 비유하며 전합니다....

[묵상] 2026년 6월 29일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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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두 기둥 오늘은 우리 교회의 두 기둥이자 신앙인의 서로 다른 두 전형을 보여주는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성격과 배경, 복음을 전하는 방식까지 모두 달랐던 두 사도를 교회가 한날에 기념하는 이유는, 두 분 모두 그리스도라는 한 분의 사랑에 깊이 사로잡혀 자신의 생명을 온전히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단순한 예언자나 스승을 넘어,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으로 알아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고백 위에 당신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약속하셨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베드로가 결코 완벽한 사람이었기에 반석이 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부인했던 나약한 인간이었으나, 자신의 부족함을 딛고 일어서게 하시는 주님의 자비를 끝까지 신뢰했기에 반석이 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반석'이란 베드로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그가 고백한 그리스도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 자체입니다. 오늘 독서들은 두 사도의 마지막 순간을 조명합니다. 베드로는 감옥에 갇혀 죽음을 앞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천사의 인도로 해방되었고,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며 담담히 고백합니다. "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 (2티모 4,7). 두 사도의 공통점은 위기의 순간마다 주님께서 곁에 계시다는 뜨거운 확신을 지녔다는 점입니다. 사도들의 위대함은 고난이 없었다는 데 있지 않고, 어떤 시련 속에서도 곁에 계신 주님의 손을 놓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교회의 일치를 상징하는 베드로와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열정을 상징하는 바오로, 이 두 정신이 우리 안에서 조화를 이룰 때 우리의 신앙은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스스로에게 살펴봅시다. 나의 신앙 고백은 주일 미사의 형식적인 암송에 머물러 있습니까, 아니면 내 삶의 모든 선택을 결정하는 든든한 반석이 되고 있습니까? 또한 바오로 사도처럼 ...

[묵상] 2026년 6월 27일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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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번 한 주간 우리는 제1독서를 통해 유다 왕국의 몰락과 예루살렘 성전 파괴라는 비극적인 역사를 지켜보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애가는 그 참혹한 폐허 위에서 쏟아내는 피맺힌 통곡을 전하며, 오늘 복음은 절망의 끝에서 이방인 백인대장의 믿음의 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희망의 길을 제시합니다. 애가의 저자는 무너진 이스라엘의 비참함을 목격하며 눈이 멀 정도로 눈물을 흘립니다. 아이들이 거리에서 굶주리고 지도자들마저 침묵에 잠긴 절망적인 상황에서 예언자는 우리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 밤에도 야경이 시작될 때마다 일어나 통곡하여라.  주님 면전에 네 마음을 물처럼 쏟아 놓아라 " (애가 2,19). 이것은 단순한 신세 한탄이 아니라,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오직 하느님께만 매달리는 간절한 기도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 건물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백성들은 마음 밑바닥에서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갈망을 길어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성벽이 무너지는 고통의 순간은, 사실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이 불신으로 무너져 내릴 때, 이방인인 로마 군대의 백인대장은 예수님을 깜짝 놀라게 할 만큼 위대한 믿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중풍으로 고통받는 종을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한마디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 (마태 8,8). 백인대장의 믿음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에 의지하지 않았으며, 예수님의 말씀 안에 담긴 하느님의 권능을 철저히 신뢰했습니다. 그는 군대 조직의 질서를 알고 있었기에 하느님의 질서 안에서 선포되는 말씀 한마디의 무게를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장모와 수많은 병자를 고쳐주신 사건을 전하며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그는 우리의 병고를 떠맡고 우리의 질병을 짊...

[묵상] 2026년 6월 26일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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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성전 재건 오늘 전례의 말씀은 우리 신앙의 자부심이었던 화려한 성전이 파괴되는 비극과 사회적으로 죽은 이와 다름없던 한 인간의 몸이 회복되는 희망을 극명하게 대비시키며 우리를 깊은 묵상으로 초대합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왕국이 바빌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는 참혹한 역사를 전합니다. 성벽은 허물어지고 하느님의 거처였던 거룩한 성전은 불타버렸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당신의 집이 파괴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그것은 이미 백성들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이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삶 속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서 눈에 보이는 건물로서의 성전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내면의 본질이 사라진 껍데기뿐인 신앙은 시련의 순간에 우리를 지켜줄 힘이 없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의 비극과 달리, 복음에서는 무너진 한 인간의 삶이 재건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당시 죄인 취급을 받으며 공동체에서 쫓겨나 살아야 했던 나병 환자가 예수님께 다가와 엎드려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님!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태 8,2). 그는 자신의 욕심대로 고쳐달라고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주도권을 주님께 맡기는 철저한 겸손을 보였으며, 비록 일그러지고 무너진 삶일지라도 주님께서 원하신다면 다시 세워질 수 있다는 전적인 신뢰를 고백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응은 가히 파격적입니다.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이에게 손을 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으나,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고자 하니 깨끗하게 되어라."  주님은 화려하지만 비어버린 예루살렘 성전보다, 지금 눈앞에서 신음하는 가엾은 영혼의 성전을 회복하는 데 더 큰 관심을 두셨습니다. 주님의 손길이 닿는 순간, 그는 병이 치유되었을 뿐만 아니라 단절되었던 세상과 다시 연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이 만든 형식을 넘어 상처 입은 이의 아픔을 가장 먼저 어루만지십니다. 우리의 모습을 돌아봅시다. 나의...

[묵상] 2026년 6월 25일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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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는 반석 오늘 우리는 '무너짐'과 '세워짐'에 대한 두 가지 대조적인 말씀을 마주합니다. 제1독서는 화려했던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백성들이 유배지로 끌려가는 비극의 현장을 보여주며, 복음은 어떤 풍랑에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집을 짓는 비결을 알려줍니다. 오늘 제1독서는 유다 왕국의 처참한 몰락을 전합니다. 젊은 임금 여호야킨과 예루살렘의 모든 지도자, 용사, 기술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갑니다. 성전의 보물들은 약탈당했고, 도성에는 가난한 이들만 남겨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반석이 아니라, 주변 강대국과의 외교나 우상 숭배라는 모래 위에 나라를 세웠기 때문입니다. 겉보기에는 견고해 보였던 성벽도 하느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자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우리 인생의 화려한 성취도 하느님 없는 모래 위에 지어진 것이라면, 시련의 바람이 불 때 이처럼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입으로만 " 주님, 주님!" 부른다고 해서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마귀를 쫓아냈더라도,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자들은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신앙이 지식이나 언어의 영역이 아니라 삶과 실천의 영역 임을 뜻합니다. 기도는 유창하게 하지만 삶 속에서 용서가 없고, 성경 지식은 해박하지만 가난한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기초 없이 지은 집과 같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화려한 겉모양(은사)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내린 순명(실천)을 보십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짓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것'입니다. 갑자기 내리는  비처럼  예상치 못한 불행이 닥치고, 세찬  강물처럼   세상의 유혹이 거세게 들이닥쳐도, 또 강한  바람처럼  주변의 비난과 시련이 몰아쳐도. 반석 위에 지은 집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 기초...

[묵상] 2026년 6월 24일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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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의 길을 닦는 겸손한 소리 오늘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광야에서 외쳤던 이, 세례자 성 요한의 탄생 대축일 입니다. 교회 전례 안에서 성인들 중 탄생일이 대축일로 지정된 분은 성모님과 세례자 요한뿐입니다. 그만큼 요한의 탄생은 단순한 한 아이의 태어남을 넘어,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구원사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한의 탄생은 기적으로 가득합니다. 아이를 가질 수 없던 늙은 부모 엘리사벳과 즈카르야에게 아들이 태어났습니다. 이웃들은 집안의 이름을 따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지만, 즈카르야는 서판에 "그의 이름은 요한" 이라고 썼습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입니다. 즈카르야가 인간적인 관습을 깨고 하느님이 정해주신 이름을 순명하며 받아들였을 때, 닫혔던 그의 입이 열리고 하느님을 찬미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기적은 내 고집과 계획을 내려놓고, 하느님이 내 삶에 붙여주신 이름, 곧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때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은 당시 수많은 사람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혹시 메시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요한은 단호하게 자신의 위치를 선포합니다.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사도 13,25). 요한의 위대함은 바로 철저한 겸손에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빛이 아니라 빛을 증언하러 온 사람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는 그의 고백은, 오늘날 자기를 드러내기에 급급한 우리에게 신앙인의 진정한 품격이 무엇인지 일러줍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이사 49,1). 요한...

[묵상] 2026년 6월 23일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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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문을 여는 선택 오늘 우리는 신앙생활의 영원한 지침서라고 불리는 '황금률'과 그리스도인이 걸어가야 할 운명인 '좁은 문'에 대한 말씀을 듣습니다. 또한 제1독서에서는 거대한 아시리아 군대 앞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던 히즈키야 임금의 승전보를 접합니다. 이 두 말씀은 우리에게 "어떤 길을 선택하며 살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단 한 문장으로 요약하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마태 7,12). 이것을 우리는 '황금률'이라 부릅니다. 이 가르침이 위대한 이유는 소극적 금지(남에게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지 마라)를 넘어 적극적 실천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존중하고, 내가 위로받고 싶다면 먼저 다가가 위로하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상대방이 먼저 변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사랑의 물꼬를 트는 용기입니다. 주님은 이어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고 권고하십니다.  넓은 문은  많은 사람이 가는 길,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사는 삶,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심의 길입니다. 이 길은 겉보기에 화려하고 편하지만 끝은 멸망입니다. 하지만,  좁은 문은  찾는 이가 적고 길도 비좁습니다. 희생이 따르고, 내 자존심을 꺾어야 하며, 남들이 비웃을지라도 하느님의 가치를 지키는 길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 7,14). 제1독서의 히즈키야 임금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강력한 아시리아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하느님을 모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항복이라는 넓고 쉬운 길이 눈앞에 있었지만, 히즈키야는 성전에 들어가 그 편지를 하느님 앞에 펼쳐 놓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는 인간...

[묵상] 2026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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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에 대한 성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관계의 고질적인 습성 중 하나인 '남을 판단하는 일'에 대해 매우 강력하고도 위트 있는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동시에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제 고집대로 살다가 결국 멸망에 이른 북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여주며, 오늘 우리가 진정 어디에 시선을 두고 살아야 하는지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남의 눈 속에 있는 작은 지푸라기 같은 티는 보면서, 정작 제 눈 속에 있는 거대한 나무 기둥인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꼬집으십니다. 타인의 작은 실수는 예민하게 잡아내면서 정작 나의 거대한 죄와 결점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심판하려 할 때, 우리는 사실 하느님의 자리에 앉으려 하는 오만에 빠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경고하십니다.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마태 7,1). 우리가 남에게 들이대는 그 엄격한 잣대는 결국 하느님 앞에서 우리 자신을 심판하는 기준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북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 멸망한 본질적인 이유는 군사력이 약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목을 뻣뻣하게 세우고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목이 뻣뻣하다'는 것은 자기 성찰이 없다는 뜻으로, 세상의 풍조나 남의 잘못에는 민감하면서도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고 하십니다. 내 안의 들보를 먼저 제거해야만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낼 수 있는 맑고 자비로운 눈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목적은 남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데 있습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큰 용서를 받은 '들보 투성이' 인간인지를 깨달을 때, 비로소 형제의 작은 실수를 안쓰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비가 생깁니다. 형제의 잘못은 단죄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