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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6년 4월 1일 성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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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과 주님 성주간 수요일입니다. 내일부터 시작될 '성삼일'이라는 거룩한 잔치를 앞두고, 오늘 복음은 우리 마음의 가장 어두운 구석을 조명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넘겨주는 대가로 은전 서른 닢을 받습니다. 당시 은전 서른 닢은 종 한 명의 몸값에 불과했습니다. 유다는 하늘의 주인을 고작 노예 한 명의 가격과 맞바꾼 셈입니다. 우리는 유다를 비난하지만, 우리 역시 삶의 순간순간 예수님을 팔아넘기기도 합니다. 나의 편안함을 위해 정의를 팔고, 나의 이익을 위해 양심을 팔며, 나의 체면을 위해 주님의 말씀을 뒷전으로 미룹니다. 우리가 주님께 "무엇을 주시겠습니까?"하고 묻는다면, 신앙은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배반 예고에 슬퍼하며 묻습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2). 그런데 유다의 질문은 다릅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25). 다른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삶의 주인이신 '주님'이었지만, 유다에게 예수님은 그저 지식을 전달하는 '스승' 혹은 '선생'에 불과했습니다. 내 삶의 주권을 내어드리지 않고 지식으로만 믿는 신앙은 위기의 순간에 너무나도 쉽게 배반의 길을 선택합니다. 여러분에게 예수님은 '주님'이신가요, 아니면 그저 좋은 말씀을 해주는 '선생님'인가요? 제1독서의 주님의 종은 우리에게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는 지친 이를 위로할 줄 아는 제자의 혀를 가졌습니다. 또한 모욕과 침 뱉음 속에서도 얼굴을 차돌처럼 단단하게 가다듬으며 하느님을 신뢰합니다. 유다는 혀로 예수님께 입을 맞추며 배반했지만, 주님의 종은 그 혀로 사람을 살립니다. 세상이 나를 비난하고 흔들 때, 우리를 지탱해주는 것은 내 능력이 아니라, "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 (이사 50,7)는 확신입니다. 오늘 유다는 어둠 속...

[묵상] 2026년 3월 31일 성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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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서 빛으로 성주간 화요일입니다.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어제보다 더 어둡고 무겁습니다. 최후의 만찬 식탁, 가장 친밀해야 할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산란하시어" (요한 13,21) 제자들의 배신을 예고하십니다. 빛과 어둠, 충성과 배신이 한데 뒤섞인 긴박한 현장 속으로 함께 들어가 봅시다. 식탁에서 예수님께 빵을 받은 유다는 밖으로 나갑니다. 성경은 그때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때는 밤이었다” (요한 13,30). 단순히 해가 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빛이신 예수님을 등지고 자기만의 욕망과 계획을 따라 나선 유다의 영혼 상태가 ‘밤’이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시선을 피하고 내 고집과 이기심을 선택할 때, 우리 인생이 아무리 밝은 대낮 같아도 칠흑 같이 어두운 밤이 되고 맙니다. 지금 내 마음은 어디에 있을까요? 주님의 빛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나만의 어둠 속으로 숨어들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자신있게 외칩니다.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요한 13,37). 그의 진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함을 몰랐습니다. 인간의 결심은 환경과 두려움 앞에 너무나 쉽게 무너집니다.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가 넘어질 것을 미리 알려주심으로써 나중에 그가 다시 일어설 회개의 징검다리를 놓아주십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약속이 매번 깨질지라도 좌절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우리의 완벽함이 아니라, 넘어진 후에 다시 그분을 찾는 겸손한 마음을 원하십니다. 제1독서에서 주님의 종은 고백합니다. “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 (이사 49,4).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제자들에게 배신당하고 죽음을 향해 가는 예수님의 모습은 완벽한 실패입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계산법은 다릅니다. 그 실패를 통해 이스라엘이 돌아오고, 더 나아가 세상 끝까지 구원의 빛이 퍼져나갑니다. 우리가 겪는 시련과 무기력한 순간들도 하느님의 손길이 닿으면, 누군가를 살리는 빛의 ...

[묵상] 2026년 3월 30일 성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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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산 없는 사랑 성주간의 첫 번째 날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을 불과 엿새 앞둔 시점, 베타니아의 한 집에서 일어난 아름답고도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깔린 이 시기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신앙의 태도가 무엇인지 마리아의 향유를 통해 묵상해 봅시다. 마리아는 순 나르드 향유 한 리트라를 가져와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닦아 드립니다. 당시 향유 한 리트라의 가치는 노동자의 1년치 임금과 맞먹었습니다. 유다의 눈에는 이것이 낭비로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사랑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고 선을 긋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거래가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오빠 라자로를 살려주신 사랑에 응답하기 위해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쏟아부었습니다. 이번 성주간 동안 우리는 주님께 무엇을 기꺼이 드릴 수 있을까요? 우리의 시간, 자존심 혹은 정성을 조금 더 쏟아부어 보면 좋겠습니다. 마리아가 향유를 붓자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하였다” (요한 12,3)고 성경은 전합니다. 사랑의 행위는 숨기려 해도 그 향기가 주변을 변화시킵니다. 반면 유다는 가난한 이들을 위하는 척하며 마리아를 비난하지만, 성경은 그가 도둑이었다고 꼬집습니다. 마리아의 손에서는 향기가 났지만, 유다의 입에서는 위선의 악취가 났습니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에 어떤 냄새를 풍기고 있을까요? 비난과 계산의 악취일까요, 아니면 헌신과 자비의 향기일까요?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 (이사 42,3).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마리아의 마음을 귀하게 여기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세상은 쓸모없어진 것, 상처 입은 것을 쉽게 버리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부서진 마음과 희미해진 믿음마저도 소중히 보듬어 주십니다. 이와 같이 부드럽고도 강한 사랑이 이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마리...

[묵상] 2026년 3월 28일 사순 제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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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 이제 내일이면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이 시작됩니다. 사순 시기의 고요한 참회는 끝나고, 이제 주님의 수난이라는 거대한 폭풍우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폭풍의 도화선이 된 유다 지도자들의 모임의 결정적 순간을 보여줍니다. 대사제 카야파는 냉혹한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예수님 때문에 민족 전체가 로마의 탄압을 받을까 두려워하며 말합니다. "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 (요한 11,50).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정치적 이익과 생존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말을 놀라운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그가 자기 생각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사제로서 예수님이 민족을 위해 죽으실 것을 예언했다 는 것입니다. 인간이 악한 마음으로 던진 돌조차,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는 디딤돌로 바꾸어 사용하십니다. 우리 삶에 닥친 이해할 수 없는 악재나 타인의 악의조차, 결국 하느님의 큰 그림 안에서는 선을 이루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하느님의 간절한 꿈을 전합니다. " 그리하여 다시는 두 민족이 되지 않고,  다시는 결코 두 왕국으로 갈라지지 않을 것이다 " (에제 37,22). 죄는 본질적으로 '갈라놓는 것'입니다. 나와 하느님을 갈라놓고, 이웃과 나를 갈라놓으며, 내 마음조차 갈갈이 찢어놓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음은 흩어진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사랑의 접착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유다 민족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 (요한 11,52) 당신의 목숨을 내놓으셨습니다. 우리가 미사와 기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이유는, 그분이 당신의 생명을 바쳐 우리 사이의 장벽을 허무셨기 때문입니다. 지도자 회의에서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잠시 유다 광야 가까...

[묵상] 2026년 3월 27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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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내려놓기 주님 수난 성지 주일을 이틀 앞둔 오늘, 복음의 긴장감은 극에 달합니다. 유다인들은 다시 돌을 집어 들었고,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박해와 위협 속에서도 당당히 증언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삶의 ‘돌’과 ‘하느님의 일’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는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방과 모략 때문에 고통스러워합니다. 믿었던 친구들조차 “실수하기만 해 봐라, 보복해주마”라며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도 살다 보면 억울한 오해를 받거나, 가까운 이들에게 상처를 입어 고립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예레미야는 절망에 빠지는 대신 이렇게 고백합니다. “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 (예레 20,11). 하느님이 곁에 계시다는 확신은 세상의 어떤 비난도 뚫고 나갈 수 있는 방패가 됩니다. 여러분의 곁에도 지금 주님이 강력한 용사로서 함께 계심을 믿으십시오. 복음에서 유다인들이 돌을 던지려 하자 예수님은 차분히 물으십니다. “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 (요한 10,32).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좋은 일들, 곧 치유, 위로, 생명의 빵에는 눈을 감고, 오직 자신들의 율법적 잣대에 어긋나는 말에만 집착했습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를 미워할 때, 그 사람이 평생 쌓아온 수많은 선행은 잊어버리고 단 한 마디의 말이나 실수에 집착하며 마음속의 돌을 집어 들곤 합니다. 주님은 오늘 돌을 내려놓고, 그 사람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일을 먼저 보라고 초대하십니다. 복음의 마지막 장면에서 예수님은 유다인들의 손에서 벗어나 요한이 세례를 주던 곳으로 가십니다. 그곳은 예수님의 공생활이 시작된 곳이자, 하늘에서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이라는 목소리가 들렸던 약속의 장소입니다. 거대한 박해와 죽음의 그림자가 덮쳐올 때, 예수님은 맞서 싸우기보다 근원으로 돌아가셨습니...

[묵상] 2026년 3월 26일 사순 제5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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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여기 사순 시기의 막바지, 성주간을 코앞에 둔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팽팽합니다. 마치 당장이라도 터질 것 같은 풍선 같습니다. 유다인들은 돌을 집어 들었고, 예수님은 당신의 신성을 강력하게 선포하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신앙의 뿌리와 지향점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은 아브람을 찾아와 ‘아브라함’이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성경에서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그 사람의 운명과 정체성을 바꾼다는 의미입니다. 99세의 노인, 자식 하나 없던 한 사람을 여러 민족의 아버지로 삼겠다는 이 약속은 인간의 상식으로는 불가능해 보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신앙이란, 나의 초라한 현실보다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을 더 신뢰하는 것 입니다. 사순 시기는 우리 역시 ‘죄인’이라는 옛 이름에서 ‘하느님의 자녀’라는 새 이름으로 불릴 준비를 하는 시간입니다. 복음에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향해 비아냥거립니다. “당신은 아직 쉰 살도 되지 않았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 (요한 8,57). 그들의 시각은 철저히 시간과 생물학적 나이에 갇혀 있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신앙의 정점을 찍는 선언을 하십니다. “나는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다” (요한 8,58). 여기서 쓰인 표현은 탈출기에서 하느님이 당신을 계시하실 때 쓰신 “나는 있는 나다” 라는 표현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옛날 분이라는 뜻이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여 ‘지금, 여기’에 늘 존재하시는 하느님 자신임을 밝히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박물관에 계신 분이 아니라, 지금 나의 고통과 기쁨 속에 살아계신 분입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진실을 마주할 때,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유다인들처럼 ‘돌을 집어 드는 것’과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른 진실을 만났을 때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가장 쉬운 도피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약속하십니다. “내 말을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음을 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