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간 목요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며, 혹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동안 가장 하기 힘든 숙제는 무엇일까요? 바로 ‘용서’입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주고 가슴에 대못을 박은 사람을 용서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머리로는 이해하려 해도 막상 그 얼굴이 떠오르면 다시금 분노와 억울함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 우리 인간의 솔직한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베드로 사도 역시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안고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오늘 제1독서와 복음은 ‘완고한 마음의 감옥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비로 걸어 나오는 삶’이라는 주제로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에제키엘 예언자에게 대낮에 이삿짐을 꾸리고 밤에는 벽을 뚫고 길을 떠나는 기이한 행동을 명하십니다.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도 보지도 않는 ‘반항아들의 집안’인 이스라엘이 완고함 때문에 결국 바빌론 유배라는 비극적인 짐을 짊어지게 될 것임을 온몸으로 예고한 것입니다. 죄를 깨닫지 못하고 마음을 닫아거는 완고함은 결국 스스로를 고통의 유배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완고함의 사슬을 끊어내는 하늘나라의 방식은 예수님의 파격적인 선포로 드러납니다. 당시 유다 사회의 기준을 훨씬 뛰어넘는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제시하며 스스로 대견해했을 베드로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이는 용서에 숫자의 제한을 두지 말고, 끝없이 무한하게 자비를 베풀라는 명령입니다. 이어지는 ‘매정한 종의 비유’는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만 탈렌트’의 빚을 단번에 탕감받고도, 정작 자신에게 작은 빚을 진 동료를 용서하지 못한 종은 결국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하느님께 받은 자비의 크기를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 도저히 갚을 수 없는 거대한 죄의 빚을 조건 없이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내 힘과 의로움으로 상대를 용서하려 하면 억울함만 남지만, “주님, 제가 이토록 큰 용서를 받았는데 어찌 형제를 제 마음의 감옥에 가두겠습니까?” 하고 고백할 때 참된 용서가 시작됩니다.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스스로 분노와 미움이라는 ‘유배의 짐’을 지고 자기 마음의 감옥에 갇히는 완고함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분노가 가득한 사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는 미사를 드려도 마음 한구석에는 수십 년 전의 앙금을 품은 채 "그 사람만은 절대 용서 못 해"라며 형제를 가두어 두기도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미워할 때 가장 먼저 피폐해지는 것은 바로 내 영혼입니다. 미움의 짐을 지고 밤잠을 설치는 우리 자신이야말로 매정한 종의 감옥에 갇힌 가련한 영혼인 것입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라고 하신 것은 상대방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 자신을 미움의 감옥에서 해방시켜 자유롭게 하시기 위한 사랑의 조치입니다.
에제키엘이 예고한 완고한 반항의 짐을 지고 가지 말고, 주님이 주시는 용서의 열쇠로 내 마음의 감옥 문을 열고 걸어 나옵시다. 오늘 내 마음에 묶여 있는 이들을 풀어줌으로써 미움의 짐을 던져버리고, 하느님 아버지가 주시는 참된 자유와 평화를 마음껏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자비의 주 하느님, 저희가 당신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무한한 죄의 빚을 탕감받았으면서도, 정작 이웃이 제게 준 작은 상처와 허물은 용서하지 못한 채 미움의 감옥에 가두어 두었음을 고백하며 뉘우치나이다. 오늘 에제키엘 예언자가 경고한 완고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리게 하시고,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조건 없이 용서하라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삶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제 힘과 의지로는 용서할 수 없사오니, 오늘 모시는 성체의 은총으로 저희의 굳어버린 마음을 녹여주시고, 미움에서 해방된 참된 평화의 기쁨을 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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