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우리는 집을 짓거나 중요한 일을 시작할 때 먼저 비용을 계산해 보고, 내가 가진 자원으로 끝까지 마칠 수 있는지 꼼꼼하게 따져보곤 합니다. 세상일에는 이처럼 치밀하게 비용과 노력을 계산하면서도, 정작 영원한 생명이 걸려 있는 신앙생활 앞에서는 "그저 때가 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며 안일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수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주님께서는 돌아서시어 제자가 되는 참된 조건을 매우 엄중하고도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이와 같이 너희 가운데에서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27.33). 오늘 말씀은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단순히 무리 속에 섞여 환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을 비우고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는 결단임을 분명히 가르쳐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감옥 안에서도 교우들에게 간절한 당부를 전합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힘쓰십시오.” 우리 안에서 당신의 호의에 따라 의지를 일으키시고 행동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불평이나 말다툼 없이 흠 없고 순결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비뚤어지고 뒤틀린 세대 한가운데서 ‘세상의 빛나는 별들처럼’ 생명의 말씀을 굳게 붙들라고 권고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피가 제물 위에 부어지는 포도주처럼 될지라도 교우들과 함께 기뻐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탑을 세우려는 사람의 비유’와 ‘적군과 싸우러 나가는 임금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기초만 놓은 채 완공하지 못하여 남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으려면 먼저 비용을 계산해야 하듯,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나 가족, 형제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도 주님 사랑 뒤에 둘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애착과 소유를 하느님보다 앞자리에 두지 않는 전적인 봉헌의 결단이 필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호소한 '생명의 말씀을 굳게 잡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구원을 이루는 자세'는,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십자가를 짊어지는 예수님의 참된 제자의 길과 하나로 맞닿아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요구하신 "자기 소유를 다 버려라"는 말씀은 가족을 미워하거나 재산을 내팽개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삶의 첫자리에 모시고, 그분의 사랑을 다른 어떤 것과도 맞바꾸지 말라’는 영적 우선순위의 선포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기억하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님은 트렌토 공의회를 성공적으로 이끌고 가톨릭 교회의 개혁을 위해 헌신하신 분입니다. 

성인은 귀족 가문 출신의 추기경이자 밀라노 대교구장이었지만, 밀라노에 무서운 흑사병이 창궐했을 때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털어 굶주린 이들을 먹이고,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고 거리를 돌며 병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고 위로를 건넸습니다.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님은 자신의 명예와 목숨이라는 비용을 기꺼이 치르며 교우들을 위해 제 십자가를 짊어지신 목자였습니다. 구원은 거저 주어지는 은총이지만, 그 은총을 살아내는 우리의 신앙은 모든 것을 내어놓는 진실한 응답을 요구합니다.


오늘날 편리함과 자기만족 그리고 손해 보지 않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는 현대 사회 속에서, '십자가를 지고 소유를 버려라'는 주님의 말씀은 무겁고 벅차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향해 찾아오시어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네 십자가는 너를 짓누르기 위한 짐이 아니라, 나와 함께 부활의 영광으로 나아가는 생명의 다리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좁고 험할 수 있지만, 결코 외로운 길이 아닙니다. 우리보다 앞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우리의 손을 붙잡아 주고 계십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겨 기초만 놓고 멈추어 서는 미지근한 신앙인이 되지 맙시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겸손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어두운 세상 한가운데서 밤하늘의 별처럼 생명의 말씀을 환히 비춥시다.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신 주님의 음성에 온 마음으로 응답하며, 오늘 하루도 참된 제자로서의 기쁨과 평화를 누리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마음 모아 축복합니다. 아멘.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묵상] 2026년 10월 7일 묵주기도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기념일

[묵상] 2026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목요일

[묵상] 2026년 10월 12일 연중 제28주간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