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9월 14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오늘 우리는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십자가’라는 단어를 떠올릴 때 여러분은 마음속에 어떤 느낌이 먼저 드십니까? 십자가는 본래 고대 로마 시대에 가장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죄수에게 내리던 처형 도구였습니다. 수치와 모욕, 극심한 고통과 죽음의 대명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가톨릭교회는 잔혹했던 십자가가 높이 들어 올려져 구원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게 되었음을 기뻐하며 축일로 지냅니다. 수치와 죽음의 틀이었던 십자가가 어떻게 우리를 살리는 '구원과 승리의 표징'으로 바뀔 수 있었는지, 오늘 성경 말씀은 그 거룩한 신비를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길을 걷다가 마음이 조급해져 하느님과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 결과 불뱀에 물려 많은 사람이 죽게 됩니다. 백성이 회개하자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구리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게 하십니다. 그리고 “불 뱀에 물린 사람은 누구든지 구리 뱀을 바라보면 살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뱀에 물려 죽어가는 이들이 기둥 위에 달린 구리뱀을 바라보았을 때 기적처럼 생명을 얻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의 구리뱀 사건을 당신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 지어 설명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의 아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3,14-15). 구리뱀 자체가 마술적인 힘을 지닌 것이 아니었듯, 십자가 나무 자체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다. 십자가 위에 매달리시어 당신 목숨을 내어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 그리고 그 사랑을 믿고 바라보는 순종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 우리에게 전하는 영적 메시지는 바로 '사랑을 통한 역설의 승리'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이 올라가고, 남을 누르고, 고통과 손해를 피하는 것이 승리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방식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시어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추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겸손과 희생의 십자가를 높이 올리시어 온 우주의 주님으로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짊어진 죄와 고통, 상처라는 나쁜 나무를 당신 십자가에 짊어지시고, 그것을 '사랑과 구원의 나무'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더 이상 절망이나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드러난 희망의 표징입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저마다 피하고 싶은 무거운 '삶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만성 질환이나 갑작스러운 병고라는 십자가, 가족 간의 오해와 갈등, 자녀 때문에 애태우는 마음의 십자가, 경제적인 중압감과 직장에서 오는 스트레스라는 십자가. 우리는 자주 "주님, 왜 저에게만 이런 시련의 십자가를 주십니까?" 하며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원망하고 불평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오늘 십자가에 달린 당신을 바라보라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고통을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라,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나의 모든 고통과 슬픔을 깊이 이해하고 함께 짊어지고 계십니다. 무조건 도망치려 하지 않고 내 십자가를 주님 십자가 곁에 겸손히 놓아둘 때, 고통은 나를 단련시키고 영적으로 성숙시키는 은총의 도구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 외아들마저 십자가에 올려놓으신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기억합시다.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아무리 무겁고 아플지라도, 구원의 십자가를 올려다보며 용기와 희망을 가집시다.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우리 모두에게 하늘의 참된 평화와 구원의 은총이 가득하기를 마음 모아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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