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8월 29일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
오늘은 주님의 길을 닦기 위해 광야에서 외치던 이, 그리고 마침내 진리를 증언하다 목숨까지 아낌없이 바친 성 요한 세례자의 수난 기념일입니다. 한여름의 끝자락에서 마주하는 요한 세례자의 순교 소식은, 타성에 젖어 있던 우리의 신앙을 일깨우며 영적인 전율을 선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기묘하고도 비극적인 내면을 지닌 한 인물, 헤로데 왕을 만나게 됩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의 말씀을 대할 때 아주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이 의롭고 거룩한 사람으로 알고 그를 두려워하며 보호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몹시 당황해하면서도 기꺼이 듣곤 하였기 때문이다”(마르 6,20).
그는 요한의 예언을 들으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동시에 그 진리의 말씀에 강하게 끌렸습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결국 자신의 체면과 세상의 즐거움을 지키기 위해 요한의 목을 베는 비극적인 선택을 하고 맙니다. 오늘 주님은 헤로데의 선택을 통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진리를 향한 갈망’과 ‘세상을 향한 집착’ 사이의 치열한 싸움을 돌아보게 하십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세상의 권력과 칼날이 아무리 서슬 퍼래도, 하느님의 진리를 품은 영혼은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구원의 역설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시며 이렇게 무장시키십니다. “너는 허리를 동여매고 일어나, 내가 너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예레 1,17). 하느님은 진리를 전하다 세상의 반대에 부딪힐 그를 ‘요새 성읍, 쇠기둥, 청동 벽’으로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오늘 복음의 요한 세례자를 통해 그대로 실현됩니다. 요한은 헤로데 왕이 동생의 아내를 차지한 부정한 죄를 짓자, 왕의 권력 앞에서도 거침없이 진리를 외쳤습니다. “동생의 아내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르 6,18).
비록 이 일로 감옥에 갇혔지만, 요한의 영혼은 하느님이 세우신 견고한 요새 성벽이었습니다. 오히려 화려한 궁전에 살면서도 영적인 불안에 떨며 요한을 두려워했던 쪽은 헤로데 왕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이 하느님의 의로움 앞에 무릎을 꿇은 순간입니다. 헤로데의 비극은 ‘듣기만 했을 뿐, 삶을 바꾸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진리를 존경하기는 했지만, 자신의 체면과 자존심, 그리고 인간적인 집착을 진리보다 더 사랑했습니다. 그 결과, 가장 화려한 생일잔치 자리에서 어처구니없게도 허영심에 휘말려 살인자가 되고 맙니다. 삶의 결단이 없는 감동은 유혹의 순간에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단호하게 죄를 끊어내지 않는 한, 우리 역시 언제든 내 안의 요한 세례자의 목을 베어버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상도 헤로데의 잔치와 닮아 있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적당히 타협하라"고 요구합니다. 직장에서 정직하려다 뒤처지는 것 같아 양심을 위축시킬 때, 내 평판이 깨질까 봐 불의를 보고도 비겁하게 침묵할 때, 강론을 들으며 가슴이 찔리면서도 성당 문을 나서는 순간 욕심과 미움을 그대로 유지할 때, 우리는 내 안의 요한 세례자를 어두운 감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주님은 아프게 물으십니다. “너는 내 목소리를 들을 때만 기뻐하고, 세상의 잔치에 나가면 나를 모른 척하려느냐? 사람들의 눈초리가 두려워 네 양심을 외면하려느냐?”
요한 세례자는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라는 고백을 자신의 피로 완성했습니다. 하느님의 신실하신 약속, “내가 너를 구하려고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예레 1,19)라는 말씀을 가슴 깊이 새깁시다. 여러분이 세상의 타협 앞에서도 당당히 진리를 살아냄으로써, 세상은 줄 수 없는 참된 평화와 복음의 기쁨을 누리는 예언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의롭고 거룩하신 주 하느님, 저희가 세상의 체면 때문에 괴로우면서도 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시늉만 하며 변화를 미루어왔음을 뉘우치나이다. 오늘 성 요한 세례자의 굳건한 믿음을 저희에게 허락하시어, 저희가 어떤 유혹 앞에서도 진리를 증언하는 요새 성벽이 되게 하소서. 오늘 모신 성체의 힘으로 저희 마음속의 비겁함과 허영을 태워주시고, 오직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용기를 주소서. 아멘.”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 3,30.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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