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3월 21일 사순 제4주간 토요일

 

하느님을 만나는 방식

오늘 복음의 배경은 초막절 축제가 한창인 예루살렘입니다. 성전 한복판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은 혼란에 빠집니다. 누군가는 그분을 ‘예언자’라 하고, 누군가는 ‘메시아’라고 부르지만, 또 다른 이들은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분을 부정합니다. 오늘 이 소란스러운 장면은 우리에게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는 방식에 대해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예수님을 잡으러 갔던 성전 경비병들이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화가 난 수석 사제들이 왜 잡지 않았느냐고 다그치자 그들은 대답합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요한 7,46). 이 경비병들은 신학 공부를 한 적도 없고, 사회적 지위도 낮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바리사이들에게 없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편견 없는 귀와 감동할 줄 아는 마음입니다. 지식은 때로 우리를 교만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순수한 마음은 말씀의 울림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오늘 우리도 습관적인 신앙생활에 젖어, 주님 말씀에 대한 경탄을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반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지식을 무기로 사용합니다. 그들은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나온다”는 성경 지식에 갇혀, 정작 눈앞에 있는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에게 성경은 하느님을 만나는 통로가 아니라, 남을 판단하고 하느님의 활동을 제한하는 규정집이 되어버렸습니다. 내가 가진 신앙의 상식, 내가 정의한 하느님의 모습이 오히려 살아계신 주님의 발걸음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시다.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의 지식보다 크신 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모두가 광기에 젖어 예수님을 단죄할 때, 니코데모가 조용히 법적인 원칙을 제시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니코데모는 이미 밤에 예수님을 찾아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입니다. 직접 만나보고 들어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신중함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타인에 대해 판단하고 결론을 내립니다. 하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심판하기 전에 먼저 듣고, 정죄하기 전에 먼저 다가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레미야처럼 예수님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죽이려는 음모 속에 서 계십니다. 그분은 논쟁에서 이기려고 하지 않으시고, 오직 진리를 갈구하는 이들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주실 뿐입니다. 사순 시기를 마무리해가는 이 시점, 우리 마음의 안경을 닦아내면 좋겠습니다. '저 사람은 안 돼'라는 편견의 안경, '나는 다 안다'라는 교만의 안경, '출신이 미천하다'라는 차별의 안경을 벗어버리면 어떨까요? 그 안경들을 벗을 때, 비로소 우리 곁에 와 계신 ‘그분처럼 말하는 분’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아는 것에 머물지 않고, 당신이 보여주시는 새로운 생명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소서.” 아멘.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묵상] 2025년 10월 14일 연중 제28주간 화요일

[묵상] 2026년 1월 8일 주님 공현 대축일 후 목요일

[묵상] 2025년 12월 2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