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3월 10일 사순 제3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셈법

사순 시기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현실적이고 기특한 질문을 던집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 당시 유다인들의 관습으로는 세 번만 용서해도 대단한 인격의 소유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니 일곱 번을 제안한 베드로는 스스로 자신을 꽤 너그럽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베드로의 계산을 완전히 박살 내버리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흔일곱 번’은 무한히 용서하라는 뜻입니다. 이는 용서를 숫자로 세고 있는 한, 그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번까지는 넘어가는데, 다음에는 어림도 없어!'라고 생각하며 용서의 횟수를 세는 순간, 우리 마음에는 이미 심판이라는 독초가 자라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를 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가 삶의 방식이 된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은 ‘횟수’가 아니라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우리가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알려주십니다. 주인에게 10,000 탤런트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종이, 정작 자신에게 100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감옥에 가둔 이야기입니다. 10,000 탤런트는 노동자가 약 16만 년을 한 푼도 안 쓰고 모아야 하는 돈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 갚을 수 없는 엄청난 금액입니다. 100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약 100일 치 품삯입니다. 큰돈이지만 노력하면 갚을 수 있는 정도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받은 용서는 우주만큼 큰데, 우리가 형제에게 옹졸하게 구는 것은 마치, 태평양을 선물 받고도 친구에게 생수 한 잔 안 주겠다고 버티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자르야는 불길 속에서 하느님께 호소합니다.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되어 하느님께 바칠 제물조차 아무것도 남지 않은 비참한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희의 부서진 영혼과 겸손해진 정신을 보시어 저희를 숫양과 황소의 번제물로, 수만 마리의 살진 양으로 받아 주소서(다니 3,39). 용서가 왜 어려울까요? 나의 자존심과 교만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내 자존심을 태워 하느님께 바치는 가장 향기로운 제물입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서 아자르야처럼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형제의 허물을 덮어줄 여유가 생깁니다. 

용서는 내 마음속에 들어온 ‘자비’라는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영적인 호흡과 같습니다.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고, 내뱉지 않으면 우리는 질식해 죽고 말 것입니다. 오늘 하루, '그때 저 사람이 나한테 이랬지' 하며 기록해 둔 마음의 빚 문서를 모두 불태워 버리면 어떨까요? 하느님이 나에게 해주신 것처럼, 그냥 이유 없이 한 번만 형제의 허물을 눈감아 주면 어떨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완벽해서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당신의 자비를 닮으려고 애쓰는 부서진 마음을 보시고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당신의 이름을 생각하시어 저희를 끝까지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계약을 폐기하지 마소서. 당신의 호의에 따라, 당신의 크신 자비에 따라 저희를 대해 주소서(다니 3,34.4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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