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5년 12월 20일

계산과 순명

성탄이 불과 닷새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전례는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순간, 바로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기로 결정하신 그 순간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하느님의 놀라운 초대에 응답하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하나는 유다 임금 아하즈의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나자렛 처녀 마리아의 태도입니다.

먼저 제1독서의 아하즈 임금을 봅시다. 그는 지금 국가적인 위기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 적들이 쳐들어와 나라가 망할지도 모르는 두려움 속에 있습니다. 그때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는 주 너의 하느님께 너를 위하여 표징을 청하여라. 저 저승 깊은 곳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아무것이나 청하여라(이사 7,11). 하느님께서는 아하즈에게 백지수표를 내미셨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음을 보여줄 테니, 무엇이든 구하라”는 파격적인 제안입니다. 그런데 아하즈는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저는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시험하지 않으렵니다(이사 7,12).

얼핏 들으면 굉장히 겸손하고 신앙심 깊은 말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거짓된 겸손이자, 정중한 거절이었습니다. 아하즈는 사실 하느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미 마음속으로 강대국인 아시리아와 동맹을 맺어 위기를 모면하려는 정치적 계산을 끝낸 상태였습니다. 그에게 하느님의 개입은 오히려 자신의 계획을 방해하는 귀찮은 일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사실은 하느님을 자신의 삶에 개입시키지 않으려 했던 것입니다.

반면, 복음 속의 마리아를 보십시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했을 때, 마리아 역시 두려웠고 당황했습니다. 처녀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당시 율법으로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인생 계획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하즈처럼 계산하거나 도망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묻습니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이것은 불신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를 묻는 개방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실 것이다”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인류 구원의 역사를 여는 위대한 대답을 내놓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아하즈는 자신이 주인이 되어 세상의 힘에 의지하려 했지만, 마리아는 철저히 주님의 종이 되어 하느님의 힘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아하즈는 “하느님, 제 계획에 방해되니 그냥 저기 계십시오”라고 했지만, 마리아는 “하느님, 제 계획을 지우시고 당신의 뜻을 제 안에 쓰십시오”라고 응답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아하즈는 결국 나라를 더 큰 위기에 빠뜨렸지만, 마리아는 온 인류에게 ‘임마누엘’을 선물했습니다.

성탄을 코앞에 둔 오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도 똑같은 초대를 하십니다. “내가 너의 삶에 들어가도 되겠느냐?” 우리는 지금 혹시 아하즈처럼 반응하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 성당에서는 주님을 찾겠지만, 사업 문제, 자녀 문제, 제 인생 계획에는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합니다. 너무 개입하시면 부담스럽습니다.” 겉으로는 점잖게 신앙생활을 하는 척하지만, 속으로는 내 삶의 통제권을 하느님께 내어드리기 싫어 문을 걸어 잠그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마리아를 바라봅시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하느님께 백지수표로 내어드렸습니다. 용기 있는 한마디 “예”가 하느님을 이 땅에 모셔왔습니다. 오늘 하루, 내 마음속의 계산기를 내려놓읍시다. 그리고 두려움 없이 기도를 바칩시다. “주님, 아하즈처럼 당신을 밀어내지 않고, 마리아처럼 제 마음의 문을 활짝 엽니다. 제 좁은 계획을 허무시고, 당신의 크신 뜻을 제 안에 잉태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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