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5년 12월 19일
인간의 끝에서 시작되는 하느님의 시간
성탄을 엿새 앞둔 오늘, 전례의 말씀은 인간적인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두 가정으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는 판관 삼손의 부모가, 복음에는 세례자 요한의 부모인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이 등장합니다. 이 두 가정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불임입니다. “임신할 수 없는 몸”(판관 13,2), “아이를 못낳는 여자”(루카 1,7). 성경에서 ‘불임’과 ‘노년’은 단순한 신체적 한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해볼 수 없는 철저한 무력함을 상징합니다. 미래가 닫혀 있고, 생명이 끊어질 위기에 처한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 ‘불가능의 시간’, '포기의 시점'에 당신의 역사를 시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장사 삼손을, 그리고 주님의 길을 닦을 위대한 예언자 세례자 요한을, 가장 생명력이 없어 보이는 메마른 태중에서 일으키십니다.
오늘 복음의 주인공 즈카르야를 묵상해 봅시다. 그는 사제로서 평생 하느님을 섬기며 의롭게 살았습니다. 그는 성소 안에서 분향하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너의 청원이 받아들여졌다. 엘리사벳이 너에게 아들을 낳아 줄 것이다”(루카 1,13 참조)라고 했을 때, 즈카르야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제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루카 1,18).
그는 기뻐하기보다 먼저 계산했습니다. 자신의 늙은 몸과 아내의 상태라는 현실의 벽을 먼저 보았습니다. 그는 평생 기도를 바쳤으면서도, 정작 하느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시려 하자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의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기적을 바란다고 기도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에이, 설마 그런 일이 일어나겠어?’ 하며 하느님의 능력을 내 좁은 생각 안에 가두곤 합니다. 그 결과 즈카르야에게 내려진 징표는 ‘침묵’이었습니다. “보라, 때가 되면 이루어질 내 말을 믿지 않았으니, 이 일이 일어나는 날까지 너는 벙어리가 되어 말을 못 하게 될 것이다”(루카 1,20).
이 침묵은 단순한 벌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인간적인 판단, 불신,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는 세상의 소음을 입 밖으로 내지 말고, 하느님께서 침묵 중에 이루시는 놀라운 생명의 신비를 목격하며 기다리라는 초대였습니다. 즈카르야는 열 달 동안 말을 잃었지만, 그 대신 믿음을 되찾았고, 나중에 입이 열렸을 때 가장 먼저 하느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불임의 영역이 있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나의 성격, 회복될 기미가 안 보이는 관계, 꽉 막힌 앞날…. 우리는 이런 상황 앞에서 즈카르야처럼 “어떻게 이런 일이 해결될 수 있겠어?” 하며 체념하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선포합니다. “인간의 끝이 하느님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불가능을 재료 삼아 당신의 가능성을 보여주십니다. 메마른 땅에서 삼손을, 늙은 부부에게서 세례자 요한을 탄생시키신 분께서, 우리의 척박한 삶 속에서도 반드시 희망의 싹을 틔우실 수 있습니다.
성탄을 앞둔 시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즈카르야의 ‘의심’이 아니라, 그가 침묵 속에서 배웠던 ‘기다림’입니다. 나의 생각과 판단 그리고 불평의 입을 잠시 닫고 침묵해 봅시다. 그리고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시는 하느님의 일하심을 잠잠히 바라봅시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포기한 그 자리에서, 가장 놀라운 기적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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