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4월 3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사랑의 마침표

오늘은 일 년 중 유일하게 미사가 봉헌되지 않는 날,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화려한 제대포도 치워지고, 감실은 비어 있으며, 성전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감돕니다. 우리는 오늘 어떤 화려한 말보다도,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주님의 마지막 숨소리와 그분의 침묵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를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이’, ‘병고에 익숙한 이’로 묘사합니다. 그분은 우리 대신 매를 맞으셨고, 우리 대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이 되셨습니다. 세상은 강하고 화려한 것을 숭배하지만, 하느님은 가장 비참하고 낮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의 일그러진 얼굴은 바로 우리가 지은 죄의 결과이며, 그분의 상처는 우리를 낫게 하는 유일한 약입니다. 오늘 십자가를 바라보며, 저 고통이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깊이 새겨봅시다.

요한 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수난기는 비극이 아니라 장엄한 승리의 기록입니다. 예수님은 끌려가시는 분이 아니라 스스로 나아가시는 분이며, 빌라도 앞에서도 당당히 진리를 선언하시는 왕이십니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으로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이 말씀은 인생이 허무하게 끝났다는 탄식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인류 구원의 역사가, 당신의 목숨을 내어놓는 지극한 사랑을 통해 마침내 완성되었다는 마침표입니다. 죄가 이긴 것 같고 죽음이 승리한 것 같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사랑으로 죽음을 정복하셨습니다.

오늘 전례 중에 우리는 ‘십자가 경배’ 예식을 거행합니다. 사제는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의 구원이 달렸네”라고 선포할 것입니다. 본래 십자가는 가장 흉악한 죄인을 처형하는 저주의 도구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 위에 못 박히심으로써, 이제 십자가는 하느님 자비의 상징이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 십자가에 입을 맞추거나 절을 하며 우리 각자의 십자가도 그분 곁에 놓아둡니다. 내 삶의 고통, 질병, 이별, 실패의 십자가가 주님의 십자가와 합쳐질 때, 그것은 더 이상 나를 짓누르는 짐이 아니라, 나를 부활로 인도하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성모님과 함께 골고타 언덕에 서 있습니다. 십자가 곁을 지키던 이들의 마음으로 주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주님의 죽음을 애도하고 침묵과 단식 속에 머뭅시다. 주님이 오늘 죽으심은 우리가 내일 살기 위함입니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이 우리 영혼을 씻어주고 있음을 믿읍시다. 사랑이 모든 것을 이겼습니다. 십자가가 우리를 구원했습니다. “아버지, 제 영을 당신 손에 맡기나이다.”(화답송).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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