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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6년 2월 28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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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느님의 ‘품’을 닮으세요 사순 제1주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생활의 ‘끝판왕’이자 가장 어려운 숙제를 내주십니다.  “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 (마태 5,44). 이 말씀은 듣기만 해도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 챙기기도 바쁜데, 원수까지 사랑하라고요?' 하는 불평이 절로 나옵니다. 하지만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왜 그래야만 하는지, 그 이유와 방법을 명확히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묻습니다. “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 (마태 5,46). 세상의 논리는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입니다. 받은 만큼 주고, 당한 만큼 갚아주는 것이 공정하다고 믿습니다. 심지어 조직 폭력배들도 자기 식구는 끔찍이 아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너희는 달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끼리끼리 사랑하는 것은 본능이지만,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품는 것은 은총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남들이 다 하는 것을 넘어서는 그 지점에서 드러납니다. 신앙인은 세상의 계산법을 초월하는 사람입니다. 왜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까요? 아버지 하느님께서 그런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 (마태 5,45). 농부가 밭에 나갔는데, 착한 사람의 밭에만 해가 비치고 나쁜 사람의 밭에는 비가 안 온다면 어떻겠습니까? 하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속 좁게 계산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자격을 따지지 않고 모두에게 쏟아지는 햇살과 같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녀라면, 우리 마음의 품도 아버지처럼 넓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차별 없는 햇살 같으신 분입니다. 오늘 복음의 결론은 “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 입니다. 여기서 ‘완전함’...

[묵상] 2026년 2월 27일 사순 제1주간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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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물을 바치기 전에 할 일 오늘은 금요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육식을 피하고, 우리 안의 욕망을 절제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고기를 먹지 않는 것보다 더 어렵고, 더 근본적인 ‘마음의 금육’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안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멈추는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의 제5계명 “살인하지 마라”를 심도있게 해석하십니다. “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 (마태 5,22). 우리는 고해성사 때 종종 “저는 남을 죽이거나 큰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 보시기에 칼로 사람을 찌르는 것만이 살인이 아닙니다. 독한 말로 상대방의 인격을 짓밟는 것, 무시하는 눈빛으로 상처를 주는 것, 마음속으로 미워하며 ‘저 사람 좀 사라졌으면’ 하고 저주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영혼의 살인’입니다. 혀는 칼보다 날카로워서, 겉으로는 피가 나지 않지만 상대방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피를 흘리게 합니다. 분노는 ‘마음속의 살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우선 순위를 정해주십니다. “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 (마태 5,23-24).  우리는 하느님께 잘 보이기 위해 미사를 드리고, 예물을 바치고, 봉사를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네 형제와 등 돌린 채 바치는 모든 정성이 나에게는 부담스럽다”고 하십니다. 사랑 없는 예배, 용서 없는 예물은 하느님께 닿지 못합니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종적인 관계는 이웃과 나 사이의 횡적인 관계가 뚫려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보다 화...

[묵상] 2026년 2월 26일 사순 제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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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의 문을 여는 절박함 사순 시기의 여정 안에서 우리는 기도의 중요성을 계속 듣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우리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의심이 있습니다. '정말 기도하면 들어주실까? 지난번에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건 안 들어주셨는데….' 오늘 전례는 우리가 왜 기도해야 하며, 어떤 태도로 기도해야 하는지, 그리고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스테르 왕비는 민족이 몰살당할 위기 앞에서 화려한 의복을 벗고 하느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녀의 기도가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절박함 때문입니다. 그녀는 “ 당신 손으로 저희를 구하시고,  주님, 당신밖에 없는 외로운 저를 도우소서 ” (에스 4,17)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힘을 잃는 이유는, 하느님 말고도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기도해 보고 안 되면 돈으로 해결하지 뭐”, “안 되면 사람을 찾아보지 뭐.” 이런 ‘플랜 B’를 가지고 있는 한, 우리는 온전히 하느님께 매달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세상의 동아줄을 놓고, 오직 당신의 손길만을 바라볼 때 가장 강력하게 일하십니다. “당신 말고는 도와줄 이가 없습니다”라는 절박함이 기도의 문을 엽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청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 하고 3단계로 강조하시며 기도를 독려하십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비유를 드십니다. “ 너희 가운데 아들이 빵을 청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생선을 청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 ” (마태 7,9-11). 우리가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때로 우리가 청한 것이 ‘돌’이나 ‘뱀’이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칼을 달라고 떼를 쓰면 부모는 주지 않습니다. 그것이 아...

[묵상] 2026년 2월 25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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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확실한 기적은 회개 사순 시기의 여정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라는 주제를 마주합니다. 오늘 전례는 알아듣는 사람과 못 알아듣는 사람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오늘 독서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즉각 회개한 이방인 니네베 사람들이 등장하고, 복음에는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여전히 표징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 대조를 통해 우리의 신앙 상태를 점검해 봅시다. 오늘 복음에서 군중은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미 예수님은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쫓아내셨지만, 그들은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면 믿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악한 세대라고 탄식하십니다. 왜 악할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자신들의 호기심이나 안전을 보장해 줄 마술만을 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기도할 때 이렇게 떼를 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 이 문제만 해결해 주시면, 제가 정말 열심히 믿겠습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하느님은 거래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온전히 신뢰하고 따라야 할 아버지이십니다. 기적을 구하는 마음은 ‘믿음’이 아니라 ‘거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 (루카 11,29). 요나 예언자는 니네베에 가서 화려한 기적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단지 하느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요나 3,4). 놀랍게도 니네베 사람들은 이 투박한 경고를 듣자마자, 임금부터 짐승까지 단식하고 자루옷을 입으며 회개했습니다. 기적을 봐서 믿은 게 아니라, 말씀이 그들의 양심을 찔렀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신기한 현상보다 더 강력한 기적은, 하느님의 말씀이 내 가슴에 박혀 나를 멈춰 세우는 것입니다. 최고의 표징은 ‘요나의 표징’, 곧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 요나보다 더 큰...

[묵상] 2026년 2월 24일 사순 제1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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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매 맺는 기도 사순 시기를 보내며 우리는 모두 기도를 더 많이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끔은 기도가 하느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나의 불안함을 달래기 위한 혼잣말의 반복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핵심을 정확히 짚어주십니다.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 (마태 6,7). 그리고 우리에게 가장 완벽한 기도로 알려진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바치는 기도의 태도를 점검해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 6,8)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을 설득해야 한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말을 많이 하고, 설명도 길게 하고, 했던 말을 또 하며 하느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빈말인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께 내 사정을 브리핑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미 다 알고 계신 아버지께 내 마음을 열고, 그분의 뜻을 신뢰하며 내어맡기는 시간입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불안이 많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기도는 ‘정보 전달’이 아니라 ‘신뢰’입니다. 나의 말은 허공에 흩어지는 빈말이 되기 쉽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다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아름다운 비유를 들려줍니다. “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 (이사 55,10). 비가 땅에 스며들어 생명을 키우듯,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스며들어 변화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내 말을 쏟아내느라 바쁜 기도를 멈추고, ‘듣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메마른 땅이 비를 머금듯,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 스며들도록 침묵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는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중 한 구절은 우리를 두렵게 만듭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

[묵상] 2026년 2월 23일 사순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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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나라로 가는 기말고사 사순 제1주간 월요일이 밝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시험에 비유하곤 합니다. 학창 시절에는 중간고사, 기말고사를 걱정하고, 어른이 되어서는 승진 시험, 자격증 시험을 치릅니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의 마지막 순간, 하느님 앞에서 치르게 될 최후의 심판이라는 시험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험 문제를 미리 알려주십니다. 놀랍게도 그 문제는 교리 지식이나 성경 암기 실력이 아닙니다.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오늘 복음인 최후의 심판 장면에서 구원받은 의인들도, 벌을 받는 죄인들도 똑같이 묻습니다. “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 (마태 25,37). “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 (마태 25,44). 두 부류 모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왕관을 쓴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사람인 배고픈 사람, 목마른 사람,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으로 변장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귀찮아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약한 이들의 모습이 바로 예수님이 현존하는 장소입니다. 하느님은 변장을 하고 우리 곁에 계십니다. 심판받은 이들의 항변을 들어봅시다. 그들은 예수님께 욕을 하거나 때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지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것을 태만의 죄라고 합니다. “나는 남의 돈을 훔치지 않았어”라며 안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제1독서의 결론은 “도둑질하지 마라”에서 멈추지 않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레위 19,18)로 나아갑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내 옆의 동료가 힘들어하는데 모른 척하는 것, 가난한 이웃을 보고도 내 주머니만 챙기는 것. 냉냉한 무관심이 ...

[묵상] 2026년 2월 21일 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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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는 병원입니다 재의 예식으로 시작한 사순 시기의 첫 주간을 마무리하는 토요일입니다. 지난 며칠간 우리는 단식과 자선 그리고 기도의 진정한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오늘 전례는 그 모든 실천의 결론이자, 우리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자기 정체성’을 확인시켜 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빛을 받기 위한 구체적인 조건을 제시합니다. “네가 네 가운데에서 멍에와 삿대질과 나쁜 말을 치워 버린다면” (이사 58,9). 여기서 ‘삿대질’은 남을 비난하고 정죄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는 사순 시기가 되면 묘하게 엄격해집니다. 그런데 그 엄격함의 잣대를 나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들이댈 때가 많습니다. “저 사람은 왜 저래?”, “신자가 되어서 저래도 돼?” 이렇게 남을 향해 손가락질을 할 때,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남의 티끌을 지적하는 재판관이 아니라, 서로의 짐을 덜어주는 형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남을 향한 검지 손가락을 접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는 레위라는 세리가 등장합니다. 당시 세리는 로마에 빌붙어 동족의 피를 빠는 공인된 죄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세리를 벌레 보듯 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보셨고,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초대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기겁하며 따집니다. “어찌하여 저런 죄인들과 어울립니까?” 예수님의 대답은 신앙의 핵심을 찌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루카 5,31-32). 이 말씀은 교회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교회는 완벽한 성인(聖人)들을 보여주는 박물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중환자들이 모여 치유받는 종합병원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 모두는 ‘죄’라는 병에 걸린 환자들입니다. 겉보기엔 멀쩡해 보여도, 속은 이기심과 교만, 상처로 곪아 터진 환자들입니다. 예수님은 환자와 같은 우리를 부르러 오셨습니다. 의사에게...

[묵상] 2026년 2월 20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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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정한 단식 사순 시기의 첫 번째 금요일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만 14세 이상 모든 신자가 육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을 지키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가 단순히 고기를 안 먹고, 밥을 덜 먹는 행위 자체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강하게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배 속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는 단식에 대한 통렬한 가르침을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께 항변합니다.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이사 58,3). 이에 대한 하느님의 대답은 충격적입니다. “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 (이사 58,3-4). 그들은 밥은 굶었을지 몰라도, 배고픔 때문에 예민해져서 일꾼들을 닥달하고, 이웃과 싸웠습니다. 이것은 단식이 아니라 종교적 다이어트와 신경질일 뿐입니다. 혹시 우리도 오늘 금육을 지킨답시고, 메뉴 때문에 가족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나 지금 힘들게 희생하고 있어”라며 유세를 떨고 있지는 않나요? 사랑이 빠진 희생은 하느님 앞에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배고프다고 짜증 내는 단식은 무효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진짜 바라시는 단식의 정의를 내려줍니다. “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 58,6-7). 진정한 단식은 ‘이동’입니다. 나에게 들어갈 몫을 줄여서, 그것이 필요한 이웃에게로 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