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5년 12월 16일 대림 제3주간 화요일
입술의 ‘예’와 가슴 치는 ‘뉘우침’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약속을 하고 다짐을 합니다. “내일부터는 꼭 운동해야지”, “이번엔 정말 화내지 말아야지”, “하느님 뜻대로 살아야지.” 하지만 그 다짐이 작심삼일로 끝나거나, 말뿐인 약속이 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아들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보여주십니다.
어떤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자, 맏아들은 “싫습니다” 하고 딱 잘라 거절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뉘우치고 일하러 갑니다. 작은아들은 “가겠습니다, 아버지!” 하고 공손하게 대답합니다. 하지만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이 둘 가운데 누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였느냐?”(요한 21,31). 정답은 당연히 맏아들입니다.
이 비유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과 죄인들을 비교하신 말씀입니다. 수석 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은 작은아들 같았습니다. 그들은 입으로는 하느님을 공경한다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예, 예” 했지만, 정작 세례자 요한이 와서 의로움의 길을 보여주었을 때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의롭다고 생각했기에 회개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세리들과 창녀들은 맏아들 같았습니다. 그들은 삶으로 하느님께 “아니요!”라고 외치며 살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의 설교를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으며, 가슴을 치며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충격적인 선언을 하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간다” (마태 21,31). 하느님 나라의 입장권은 ‘과거의 화려한 경력’이나 ‘매끄러운 말솜씨’가 아니라, ‘지금, 여기서의 뉘우침과 변화’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스바니야 예언서는 뉘우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더 깊이 보여줍니다. 스바니야는 예루살렘을 두고 “반항하는 도성, 더렵혀진 도성”(스바 3,1)이라고 꾸짖습니다. 그들이 교만하여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 가운데서 거만스레 흥겨워하는 자들을 치우시고, 가난하고 가련한 백성을 남겨 두겠다고 약속하십니다(스바 3,12 참조).
이 ‘남은 자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의 맏아들처럼, 자신의 힘을 자랑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며, 오직 “주님의 이름에 피신하는”(스바 3,12 참조)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으며”(스바 3,13), 입술의 약속이 아니라 삶의 진실함으로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대림 시기는 우리가 맏아들이 되어가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삶 동안 하느님의 부르심에 “싫습니다”, “귀찮습니다” 하며 등을 돌렸을지도 모릅니다. 냉담했을 수도 있고, 습관적인 죄에 빠져 살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중에 뉘우치고 갔느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과거가 어떠했든, 지금 뉘우치고 당신의 포도원, 곧 사랑의 실천으로 발길을 돌리는 자녀를 가장 기쁘게 맞이하십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교만과 위선으로 가득 차 “가겠습니다”라고 말만 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작은아들의 꼴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오늘 하루, 거창한 말이나 지키지 못할 약속보다는, 내 가슴을 치는 진솔한 뉘우침 하나를 봉헌합시다. 그리고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으니, 주님의 뜻을 지금 당장 몸으로 실천합시다.
“주님, 제가 입술로만 당신을 공경하지 않게 하시고, 뉘우치는 마음과 겸손한 행동으로 당신의 뜻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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