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5년 11월 20일 연중 제33주간 목요일
당신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있습니까?
오늘 복음은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모습 중 가장 슬픈,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모습 중 하나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가까이 이르시어, 도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십니다(루카 19,41 참조). 승리의 입성을 앞두신 분이, 왜 우셨을까요? 그분은 지금 당신 여정의 정점, 당신이 그토록 사랑한 거룩한 도성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눈에는 아름다운 성전이 아니라, 끔찍한 파멸의 미래가 보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탄식하십니다.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루카 19,42.44).
‘하느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 바로 ‘방문의 때’입니다. 예루살렘은 수천 년간 메시아를 기다려왔습니다. 구원을 갈망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구원자이신 예수님, 평화 그 자체이신 분이 그들 가운데 서 계셨을 때,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눈은, 세상의 권력과 재물, 웅장한 돌로 지어진 성전이라는 헛된 영광에 가려져, 바로 곁에 와 있는 참된 평화를 보지 못하는 영적인 맹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이토록 무지하고 완고한 인간의 ‘못 알아봄’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슬픔이셨습니다.
그렇다면, ‘방문의 때’를 알아본 사람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요?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기가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마타티아스의 시대에, 하느님의 백성에게도 ‘방문의 때’가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화의 방문이 아니라, 시험의 방문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임금의 관리들)이 그들에게 다가와 달콤한 유혹을 속삭입니다. “모든 민족들과 유다 사람들과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처럼, 당신도 앞장서서 왕명을 따르시오. 그러면 당신과 당신 아들들은 임금님의 벗이 될 뿐만 아니라, 은과 금과 많은 선물로 부귀를 누릴 것이오”(1마카 2,18).
그들이 요구한 것은 단 하나, 하느님의 율법을 버리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배교의 시늉이었습니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빠졌던 유혹과 똑같습니다. 세상의 영광과 참된 신앙 사이의 선택입니다. 이때 마타티아스는 어떻게 합니까? 그는 큰 소리로 외칩니다. “임금의 왕국에 사는 모든 민족들이 그에게 복종하여, 저마다 자기 조상들의 종교를 버리고 그의 명령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더라도, 나와 내 아들들과 형제들은 우리 조상들의 계약을 따를 것이오. 우리가 율법과 규정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있을 수 없소”(1마카 2,19-21).
그는 자신에게 다가온 ‘방문의 때’를 정확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이것은 타협의 순간이 아니라, 선택의 순간임을 알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율법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올라, 자신들의 안락한 집과 재산을 버리고 하느님의 계약을 지키기 위해 광야로 도망칩니다.
오늘 말씀들은 지금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당신을 찾아오시는 하느님을 알아보고 있습니까?” 하느님의 ‘방문의 때’는 2천 년 전 예루살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 나의 삶 속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의 맹인처럼, 우리의 영적인 눈이 떠지기를 바라며 우리 곁을 지나가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소음에 취해,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마타티아스 시대처럼, 우리에게 매일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세상의 거짓된 평화와 안락함을 택하겠느냐, 아니면 손해를 보더라도 나의 진리를 따르겠느냐?” ‘적당히 남들처럼 살라’는 세상의 유혹, ‘신앙은 네 마음속에만 두라’는 속삭임, ‘정직하게 살면 너만 손해 본다’는 비웃음…, 이 모든 것이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는 "임금의 관리들"(1마카 2,15)입니다. 이러한 선택의 순간, 우리의 반응은 어떤가요?
예루살렘처럼, 내 삶의 평화(안정된 직장, 인간관계, 재산)가 깨질까 봐 두려워, 정작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러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나요? 내 눈앞의 돌로 지은 성전(세상의 업적)을 지키려다, 영원한 성전이신 주님을 놓치고 있지는 않나요?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알아보지 못할 때, 오늘도 우리를 보시며 눈물 흘리십니다.
더 이상 주님을 슬프게 해드리지 맙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타티아스의 거룩한 열정입니다. 나의 안일함을 깨뜨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결단입니다. 오늘 하루, 내 삶의 아주 작은 순간에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청합시다. 세상의 유혹 앞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마타티아스의 용기를 청합시다. 그리하여 더 이상 주님의 슬픔이 아니라, 당신을 알아본 우리로 인해 기뻐하시는 주님의 미소를 되찾아 드리는 깨어있는 자녀들이 됩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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