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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5년 12월 31일 성탄 팔일 축제 제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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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시간’에 만나는 ‘영원한 시작’ 다사다난했던 2025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오늘 해가 지면 우리는 또 한 해를 역사 속으로 보내고,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게 됩니다.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누구나 숙연해지고, 지나온 날들에 대한 아쉬움과 다가올 날들에 대한 설렘이 교차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전례의 말씀들은 ‘끝’과 ‘시작’의 경계에 서 있는 우리에게 시공간을 초월한 깊은 지혜를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비장한 목소리로 선언합니다. “자녀 여러분, 지금이 마지막 때입니다” (1요한 2,18). 요한이 말한 ‘마지막 때’는 단순히 시간의 종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세력, 곧 ‘그리스도의 적’들이 나타나 진리를 위협하는 영적인 위기의 시간을 뜻합니다. 한 해의 끝자락에서 이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올 한 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의 적, 곧 거짓과 유혹 속에 흔들렸습니까? 세상의 가치관, 물질에 대한 탐욕, 이기심이라는 거짓들이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떼어놓으려 했습니다. “지금이 마지막 때” 라는 사도의 경고는, 지나가는 시간에 휩쓸리지 말고, 정신을 바짝 차려 진리를 붙잡으라는 호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진리는 무엇일까요? 오늘 요한복음의 장엄한 서문이 그 답을 줍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요한 1,1.14).  세상의 모든 시간은 흘러가고, 우리의 젊음도, 올해의 성공과 실패도 모두 지나갑니다. 그러나 말씀이신 하느님은 영원히 계십니다. 시간의 알파요 오메가이신 그분께서,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 속으로 들어오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붙잡아야 할 유일한 희망의 닻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분의 충만함에서 우리 모두, 은총에 은총을 받았다” (요한 1,16). 2025년을 되돌아보면, 기쁜 일도 있었고, 슬픈...

[묵상] 2025년 12월 30일 성탄 팔일 축제 제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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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vs 사랑 어느덧 2025년의 끝자락,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날입니다. 연말이 되면 우리는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며 만감이 교차하곤 합니다. ‘올 한 해 나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바쁘게 달려왔나?’ 하는 허무함이 들기도 하고, 다가올 새해에 대한 막막함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오늘 전례는 한 해를 마무리하는 우리에게 사라지는 것과 영원히 남는 것에 대한 지혜를 들려줍니다. 제1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마치 인생을 다 산 지혜로운 노인처럼 우리에게 간곡히 당부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1요한 2,15).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이 아니라,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욕망의 시스템’을 말합니다. 요한은 그것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육신의 탐욕 : 쾌락만을 좇는 삶 눈의 탐욕 : 겉보기에 화려한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 : 자신의 재산과 지위를 뽐내는 교만 우리는 올 한 해 동안 이 세 가지를 얻기 위해 얼마나 애썼습니까? 하지만 요한 사도는 단언합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달력의 마지막 장이 넘어가듯, 우리가 그토록 집착했던 성공, 재물, 인기도 결국은 바람처럼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지나가지 않고 영원히 남는 삶’은 어떤 모습일까요? 오늘 복음이 소개하는 예언자 한나 가 그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한나는 여든네 살의 과부였습니다. 젊은 시절 남편을 잃고 홀로된 긴 세월 동안, 그녀는 세상의 즐거움을 좇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삶은 겉보기에 초라하고 외로워 보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녀가 “성전을 떠나는 일 없이 단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느님을 섬겼다” (루카 2,37)고 기록합니다. 그녀는 세상의 시간을 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세상의 화려함 대신 성전의 침묵을 택했고, 육신의 편안함 대신 단식과 기도를 택했습니다...

[묵상] 2025년 12월 29일 성탄 팔일 축제 제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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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이라는 등불 성탄의 기쁨이 계속되는 팔일 축제 기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구유에 누우신 아기 예수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에 머물기를 빕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감격에 젖은 한 노인, 시메온을 만납니다. 그는 평생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려온 의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마침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하느님을 찬미하며 노래합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루카 2,30). 시메온은 어떻게 평범해 보이는, 가난한 부부의 품에 안긴 아기를 보고 단번에 ‘구원자’임을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수많은 사람이 성전을 오갔지만, 오직 시메온만이 아기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비결은 그의 눈이 성령에 의해 맑게 깨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기다렸기에, 인간의 겉모습 너머에 있는 하느님의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메온은 마리아에게 아주 의미심장하고도 고통스러운 예언을 합니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35). 빛으로 오신 예수님은 세상에 평화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선택을 강요하십니다. 빛이 오면 어둠이 드러나듯이, 예수님 앞에서는 사람들의 숨은 생각과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그 빛을 받아들여 일어서지만, 누군가는 그 빛을 거부하여 걸려 넘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님을 거부하여 넘어지는 어둠 속에 있지 않고, 시메온처럼 빛을 알아보며 일어서기 위해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오늘 제1독서인 요한 1서는 그 기준을 아주 명확하고 단호하게 제시합니다. “빛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아직도 어둠 속에 있는 자입니다” (1요한 2,9). 요한 사도는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나는 하느님을 안다”, “나는 신앙심이 깊다”고...

[묵상] 2025년 12월 27일 성 요한 사도 복음사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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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 성탄 팔일 축제 내의 셋째 날입니다. 어제는 피를 흘려 증거한 첫 순교자 스테파노를 기억했는데, 오늘은 피를 흘리지 않았으나 평생 사랑으로 주님을 증거한 성 요한 사도를 기념합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을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라고 칭했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 가슴에 기대어 있던 제자였고, 십자가 아래까지 주님을 지켰으며, 훗날 요한복음과 서간, 묵시록을 통해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위대한 진리를 남긴 분입니다. 오늘 전례는 ‘사랑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체험하고, 어떻게 주님을 알아보는지에 대한 영적인 비밀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첫째, 사랑하는 사람은 추상적으로 믿지 않고 구체적으로 체험합니다. 오늘 제1독서인 요한 1서의 시작 부분을 보십시오. 요한 사도의 목소리에는 확신과 전율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들은 것, 우리 눈으로 본 것, 우리가 살펴보고 우리 손으로 만져 본 것, 이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1요한 1,1). 요한에게 예수님은 책 속에 있는 이론이나 먼 하늘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강생하신 말씀이신 아기 예수님을 직접 보았고, 그분의 심장 소리를 들었으며, 그분의 따뜻한 손을 만져보았습니다. 성탄은 바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만져지는 분’이 되신 사건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직접 체험한 생생한 기쁨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어 안달이 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지도록” (1요한 1,4)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머리로만 알고 있는 교리입니까, 아니면 내 삶에서 살아 숨 쉬고 만져지는 체험입니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고 했습니다. 요한처럼 주님을 깊이 사랑할 때, 우리는 일상의 순간들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만질 수 있게 됩니다. 둘째, 사랑하는 사람은 남들보다 더 빨리 달리고, 더 깊이 봅니다. 오늘 복음은 빈 무덤을 향해 달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주님이 무덤에 계시지 않는다”는...

[묵상] 2025년 12월 26일 성 스테파노 첫 순교자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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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 옆에 놓인 십자가 어제 우리는 기쁨과 환호 속에서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했습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평화!” 라는 천사의 노랫소리가 아직 귓가에 맴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인 오늘, 전례의 색깔은 순백색에서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으로 바뀝니다. 교회는 왜 평화로운 성탄 바로 다음 날, 처참하게 돌에 맞아 죽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 축일을 배치했을까요? 그것은 ‘성탄 ’ (Incarnation)의 진정한 의미 를 우리에게 일깨우기 위해서입니다. 아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단순히 낭만적인 동화를 쓰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분은 어둠 속에 있는 세상에 ‘빛’으로 오셨고, 빛이 오면 어둠은 반발하기 마련입니다. 나무 구유는 결국 나무 십자가를 향해 있으며, 베들레헴의 평화는 세상의 박해를 통과하여 완성된다는 사실을 스테파노 성인이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의 최후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사람들은 스테파노의 지혜와 성령을 감당할 수 없자, 분노하여 이를 갈며 그에게 달려듭니다. 사방에서 돌이 날아오는 끔찍한 상황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공포에 질려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달라고 애원하거나, 저주를 퍼부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테파노는 전혀 다른 곳을 보고 있었습니다. “ 그러나 스테파노는 성령이 충만하였다.  그가 하늘을 유심히 바라보니,  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이 보였다 ” (사도 7,55). 세상은 그에게 죽음의 돌을 던졌지만, 그는 열린 하늘을 보았습니다. 세상은 그를 향해 증오를 쏟아부었지만, 그는 용서를 내어놓았습니다. “주님, 이 죄를 저 사람들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사도 7,60). 스테파노의 이 마지막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닮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에서 ‘작은 예수’였습니다.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을 자기 안에 완벽하게 받아들였기에, 죽음의 순간...

[묵상] 2025년 12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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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을 택할 때 열리는 입 성탄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길을 닦으러 온 선구자, 세례자 요한의 탄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탄생 설화에서 가장 긴장감이 도는 순간은 바로 아기의 이름을 짓는 장면입니다. 당시 유다 풍습에 따르면, 장남의 이름은 아버지의 이름을 따르거나 집안 어르신의 이름을 따르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서 친척들과 이웃들은 당연히 아기 이름을 아버지와 똑같이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했습니다. 이것은 전통이고 상식이며, 인간적인 질서였습니다. 그런데 어머니 엘리사벳이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루카 1,60). 사람들은 의아해합니다. “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 (루카 1,61). 이것은 단순히 이름에 대한 논쟁이 아닙니다. 이것은 ‘과거의 관습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새로운 뜻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치열한 싸움입니다. 그때 사람들은 벙어리가 되어 있던 아버지 즈카르야에게 묻습니다. 즈카르야는 서판을 달라 하여 이렇게 씁니다. “그의 이름은 요한” (루카 1,63). 이 짧은 문장을 쓰는 순간,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 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 (루카 1,64). ‘요한’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은총이시다)”입니다. 즈카르야는 그동안 자신의 생각과 불신에 갇혀 침묵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인간적인 혈통과 관습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을 선택했을 때, 비로소 그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찬미가 터져 나왔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영적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우리 집안은 원래 그래”, “남들은 다 이렇게 해”, “이게 세상 사는 상식이야”라는 고정관념과 관습에 매여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벙어리 신세를 면치 못합니다. 그런 삶에서는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찬미가 터져 나올 수 없습니다.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