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2026년 2월 14일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 기념일
감사가 만드는 기적
한 주간을 마무리하는 토요일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는 슬라브 민족의 사도이신 성 치릴로 수도자와 성 메토디오 주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인간이 미래에 대한 불안을 마주했을 때 취하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보여줍니다. 하나는 두려움 때문에 계산하는 태도이고, 다른 하나는 사랑 때문에 맡기는 태도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예로보암 임금은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에게 왕권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늘 불안했습니다. ‘백성이 예루살렘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다가, 마음이 변해서 나를 죽이면 어떡하지?’(1열왕 12,27 참조). 이 불안감 때문에 그는 치명적인 죄를 저지릅니다. 하느님을 믿는 대신,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금송아지 둘을 만들고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여, 여러분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여러분의 하느님께서 여기에 계십니다”(1열왕 12,28).
그는 편리함을 미끼로 백성들을 타락시켰습니다. 예로보암의 죄는 하느님을 몰라서가 아니라, 내 미래를 내가 통제하려는 욕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도 미래가 불안할 때, 하느님께 의탁하기보다 통장 잔고, 인맥 혹은 점집과 같은 나만의 금송아지를 만들어 위안을 삼으려 하지는 않나요? 불안은 '우상'이라는 가짜 신을 만들어 냅니다.
반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사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닌 군중이 굶주리게 되자, 그분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저 군중이 가엾구나. 벌써 사흘 동안이나 내 곁에 머물렀는데 먹을 것이 없으니 말이다. 내가 저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내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저들 가운데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마르 8,2-3).
예수님의 행동 원리는 정치적 계산이 아니라 측은지심입니다.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 누가 어디서 빵을 구해 저 사람들을 배불릴 수 있겠습니까?”(마르 8,4) 하며 계산기를 두드렸지만, 예수님은 계산을 멈추고, 가지고 있는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계산을 멈추게 합니다.
예수님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라고 닥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빵이 몇 개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일곱 개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8,5). 예수님은 작고 초라한 빵 일곱 개를 들고 감사를 드리셨습니다. 예로보암은 모든 것을 가지고도 불안해서 금송아지라는 가짜 신을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부족한 빵을 들고도 하느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 감사가 4천 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만들었습니다. 내가 가진 빵 일곱 개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광야에서 자주 배고픔과 불안을 느낍니다. 그때 예로보암처럼 “성당 가기 번거롭다, 기도는 나중에 하자” 하며 편안함이라는 금송아지를 찾지 마십시오. 그것은 우리 영혼을 죽이는 길입니다. 대신, 나의 시간, 재능, 기도와 같은 내가 가진 작고 초라한 것을 예수님께 내어드리십시오. “주님, 제가 가진 것은 이것뿐입니다” 하고 내어놓을 때, 주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그것을 축복하시어 여러분의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았더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다”(마르 8,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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