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025의 게시물 표시

[묵상] 2025년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이미지
우리를 향한 성덕의 초대 오늘 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이라는 거룩하고 기쁜 날을 맞이했습니다. 오늘 이 축일은, 우리가 성당의 제단 위에서 공경하는 위대한 성인들, 예를 들어 성 베드로, 성 프란치스코, 성녀 데레사와 같은 ‘특별한 영웅’들만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이 축일은, 바로 우리와 똑같이 이 땅에서 살아가며 넘어지고, 아파하고, 다시 일어섰던,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 (묵시 7,9)를 위한 날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성덕의 초대장’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인이 되는 길, 곧 ‘참된 행복’에 이르는 길을 직접 가르쳐 주십니다. 그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길과는 정반대의 길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부유하여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강해져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 ‘웃어라, 그러면 행복할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산에 오르시어 우리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 (마태 5,3-4.10). 이 ‘참행복 선언’은 바로 하느님께서 그리시는 ‘성인의 초상화’입니다. 성인은 자신의 힘이나 재물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는 ‘가난한 마음’ 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인은 이웃의 아픔과 세상의 죄를 보며 함께 ‘슬퍼할’ 줄 아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성인은 불의에 맞서 ‘의로움에 목마른’ 사람이며, 그 때문에 ‘박해’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이 치열한 삶을 살아낸 사람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오늘 제1독서인 묵시록이 그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요한 사도는 하늘에서 “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 (묵시 7,9) 그야말로 셀 수 없는...

[묵상] 2025년 10월 31일 연중 제30주간 금요일

이미지
  규칙에 갇힌 마음, 사랑으로 치유하는 마음 오늘 복음은 긴장감이 감도는 식사 자리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는 따뜻한 환대의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는데 ” (루카 14,1)라고 전합니다. 그들은 올가미를 놓으려고 눈에 불을 켠 채 예수님을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 팽팽한 긴장 속에서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수종을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몸이 붓고 숨이 차는, 누가 보아도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쩌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 자리에 데려다 놓았는지도 모릅니다. ‘안식일에, 이 거룩한 날에, 저 자가 과연 저 사람을 고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적인 시선과 마음을 꿰뚫어 보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침묵 속에 갇혀 있는 위선을 향해 먼저 질문을 던지십니다. “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합당하지 않으냐?” (루카 14,3). 아무도 대답하지 못합니다. ‘합당하다’고 하면 그들이 스스로 율법을 어기는 셈이 되고, ‘합당하지 않다’고 하면 자신들의 무자비함을 드러내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비겁한 침묵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하십니다. " 예수님께서는 그의 손을 잡고 병을 고쳐서 돌려보내셨습니다” (루카 14,4). 그리고 그들이 반박할 수 없는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 너희 가운데 누가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지면  안식일일지라도 바로 끌어내지 않겠느냐? ” (루카 14,5). 바리사이들에게는 율법의 조항이 한 인간의 고통보다 더 중요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안식일’이라는 규칙의 종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율법이라는 차가운 돌로 굳어져, 바로 눈앞에서 신음하는 형제의 고통을 보지 못했습니다. 바로 이 ‘규칙에 갇힌 마음’이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그토록 애통해하는 이유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동족...

[묵상] 2025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이미지
  어떤 것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 오늘 복음에서 어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다급하게 경고합니다. “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 (루카 13,31). 당대 최고의 권력자, 자신의 형제마저 죽인 잔혹한 왕이 당신을 죽이려 한다는 소식입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요? 아마도 즉시 몸을 숨기거나,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칠 계획을 세웠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습니다. 그분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경고를 가져온 이들에게 당당하게 말씀하십니다. “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 (루카 13,32). 헤로데라는 권력의 위협 앞에서도, 당신의 사명, 곧 우리를 치유하고 구원하시는 일을 멈추지 않겠다는 확고한 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도망치시기는커녕, 오히려 당신이 가야 할 길을 재확인하십니다. “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 (루카 13,33). 그분은 당신을 기다리는 죽음의 도시, 예루살렘을 향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나아가십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이토록 두려움 없게 만들었을까요? 무엇이 그분을 죽음의 위협을 뚫고 나아가게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당신을 거부하고 죽이려 하는 그 예루살렘을 향한, 꺾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분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탄식하십니다. “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 (루카 13,34). 암탉은 독수리나 맹수가 나타나면, 자신이 찢길 것을 알면서도 날개를 펼쳐 병아리들을 품습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바로 그 모습입니다....

[묵상] 2025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이미지
좁은 문 그리고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 오늘 복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매우 궁금하고, 또 어쩌면 두려운 질문을 하나 던집니다.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루카 13,23). 이 질문은 2천 년 전 그 사람만의 질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도 마음속으로 한 번쯤 품어보았던 질문입니다. ‘나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을까?’ , ‘이렇게 사는 것으로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몇 명이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루카 13,24). ‘힘써라’는 이 단어는, 그리스어 원어로 보면 ‘(운동선수가) 목숨을 걸고 싸우다’, ‘고뇌하며 애쓰다’라는 아주 격렬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은 그저 주일미사에 출석 도장을 찍는다고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치열한 노력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더욱 강도를 높여 말씀하십니다. 문이 닫힌 뒤에 많은 사람이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루카 13,25) 라는 겁니다. 또한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은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루카 13,26-27) 하고 냉정하게 내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합니다. 매주 미사에 와서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시며, 그분의 말씀을 듣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같습니다. ‘나는 성당에 다닌다’, ‘나는 세례받은 신자다’라는 그 사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격적인 관계 없이, 삶의 변화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먹고 마셨지만’ 정...

[묵상] 2025년 10월 28일 성 시몬과 성 유다(타대오) 사도 축일

이미지
  낯선 이들을 한집안으로 부르시는 주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열두 사도 중 두 분, 성 시몬과 성 유다 사도의 축일을 지냅니다. 이분들에 대해 우리는 솔직히 아는 바가 많지 않습니다. 복음에서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란 어렵고, 베드로나 요한처럼 큰 역할을 맡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어쩌면 교회라는 거대한 건물의 눈에 띄지 않는, 그러나 없어서는 안 될 ‘숨겨진 초석’과도 같은 분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아는 거의 유일한 정보, 바로 성 시몬의 별명 하나가 우리에게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줍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그를 “열혈당원이라고 불리는 시몬” (루카 6,15)이라고 소개합니다. ‘열혈당원’은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에 맞서 무력 항쟁도 불사하던 열렬한 민족주의자, 독립 투쟁가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은 로마에 대한 적개심과 정치적 해방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열두 명의 사도단 안에는 또 누가 있었습니까? 바로 ‘마태오’라는 이름을 가진 세리가 있었습니다.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동족의 피를 빨아 로마에 세금을 바치고 자신의 배를 불리던, 민족의 반역자요 죄인의 대명사였습니다. 독립 투쟁가 시몬과 민족의 반역자 마태오가 한자리에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같은 스승을 따르며, 한솥밥을 먹고, 같은 사명을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보다 더 어색하고, 모순되며, 가망 없어 보이는 조합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 불가능해 보이는 조합 속에, 오늘 복음과 독서의 핵심 진리가 숨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런 선택을 하셨을까요? 오늘 복음은 그 선택 직전에 예수님께서 무엇을 하셨는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 (루카 6,12). 열두 사도를 뽑은 예수님의 선택은 그분의 인간적인 계획이나 정치적인 계산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밤샘 기도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따른 결과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도저히 하나가 될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