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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6년 1월 19일 연중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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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종과 기쁨 연중 제2주간을 시작하는 월요일입니다. 오늘 전례는 신앙생활에서 형식과 본질 중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아주 날카롭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가 무엇을 바쳤는가?”, “내가 어떤 율법을 지켰는가?”에 집중하지만, 하느님의 관심사는 우리의 마음 상태에 있습니다. 첫째, 제사는 순종을 덮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울 왕은 하느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 중에서 가장 좋은 양과 소를 남겨둡니다. 그리고 사무엘 예언자가 추궁하자 이렇게 변명합니다. “ 군사들이 주 어르신의 하느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에서도 가장 좋은 것을 아껴 둔 것이지요 ” (1사무 15,15). 사울은 ‘제물’이라는 거룩한 핑계를 댔습니다. 하느님께 바치기 위해서라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하지만 사무엘은 하느님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합니다. “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 (1사무 15,22).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살진 송아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의 순종하는 마음입니다. 내 고집대로 행동해 놓고, 나중에 헌금을 많이 하거나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그 불순종이 덮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둘째, 단식은 기쁨을 이길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은 예수님께 따집니다.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 (마르 2,18). 당시 단식은 경건함의 상징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의 비유를 드십니다. 신랑(예수님)이 함께 있는 잔치 날에 슬픈 얼굴로 굶고 있는 것은 오히려 예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유명한 말씀이 나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마르 2,22). '새 포도주'는 예수님께서...

[묵상] 2026년 1월 11일 주님 세례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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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그치지 않는 사랑 오늘은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구유에 누워 계시던 아기 예수님을 경배했던 성탄 시기가 끝나고, 이제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며 공생활을 시작하시는 의젓한 청년 예수님을 만나는 날입니다. 오늘 복음인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에서,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 사이의 대화를 아주 중요하게 다룹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깜짝 놀라며 말립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마태 3,14). 요한의 말은 지당합니다. 죄 없으신 분이 왜 회개의 세례를 받으십니까? 윗분이 아랫사람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마태 3,15). 여기서 ‘모든 의로움’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며, 죄 많은 인간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너희와 다르다’며 높은 제단 위에 앉아 계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죄인들이 씻은 더러운 물, 그 차가운 요르단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셨습니다. 죄가 없으신 분이 죄인들의 줄에 서심으로써, 죄인인 우리를 단죄하는 대신 우리와 어깨동무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의로움’이자 ‘겸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제1독서인 이사야 예언서에 예언된 ‘주님의 종’의 모습과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이사 42,3). 세상은 부러진 갈대는 쓸모없다고 꺾어버리고, 희미한 등불은 귀찮다고 꺼버립니다. 약육강식의 논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다릅니다. 우리 영혼이 죄로 인해 상처 입고 부러진 갈대처럼 흔들릴 때, 그분은 우리를 내치지 않으시고 조용히 우리 곁으로 오십니다. 그리고 당신께서 직접 그 낮은 물에 들어가심으로써, 우...

[묵상] 2025년 12월 8일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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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를 이기는 은총 오늘은 대림 시기의 기쁨이 절정에 달하는 날 중 하나입니다. 바로 한국 교회의 수호자이시며, 인류 구원의 새벽별이신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입니다. "성모님이 원죄 없이 잉태되었다" 는 교리는 “성모님이 훌륭하시다”라고 단순히 칭송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그리고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구원의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고 은혜로운지를 보여주는 ‘희망의 사건’입니다. 오늘 전례는 인류 역사의 가장 어두운 순간과 가장 찬란한 순간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제1독서 창세기 는 인류의 비극을 보여줍니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습니다. 죄는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두려운 존재’로, ‘피해야 할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 제가 알몸이기 때문에 두려워 숨었습니다" (창세 3,10)라는 아담의 고백은, 죄로 인해 깨어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숨어 있는 인간을 내치지 않으시고, 이미 구원의 약속을 주십니다. 뱀의 머리를 짓밟을 여인의 후손, 곧 구원자를 약속하십니다. 오늘 복음 은 그 약속이 어떻게 실현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드님을 담을 그릇을 준비하셨습니다. 죄로 오염된 그릇에는 거룩하신 분이 담길 수 없기에, 하느님께서는 마리아가 잉태되는 첫 순간부터 원죄의 물듦 없이, 오직 은총으로 가득 채워 보호하셨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마리아를 “은총이 가득한 이” (루카 1,28)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가득하다’는 것은 빈틈이 없다는 뜻입니다. 성모님의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꽉 차 있어서, 죄가 들어설 자리가 조금도 없었다는 뜻입니다. 에덴동산의 하와는 유혹 앞에서 하느님께 “아니요” 라고 말하며 불순종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하와’이신 마리아는 천사의 말 앞에서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시며, 온전한 “예” 로 순종의 길,...

[묵상] 2025년 10월 22일 연중 제2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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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의 종으로 살아가십니까? 혹시 귀한 것을 누군가에게 맡겨본 경험이 있나요? 잠시 집을 비우면서 화초에 물을 주거나 반려동물을 돌봐달라고 부탁할 때, 우리는 믿을 만한 사람을 신중하게 고릅니다. 그리고 그 부탁을 받은 사람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책임감을 가지고 그 일을 성실하게 수행합니다. ‘맡긴다’는 행위와 ‘맡는다’는 행위 사이에는 깊은 ‘신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를 ‘신뢰’의 관계, 곧 ‘주인과 관리인’의 관계로 설명하십니다. 주인은 종에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맡기고 떠납니다. 그리고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도둑이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루카 12,39-40) 이 말씀을 들으면 덜컥 겁이 날 수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주님께서 오셔서 내 삶을 심판하시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핵심은 우리에게 겁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신뢰하시기에 당신의 집인 이 세상을 왜 우리에게 맡기셨는지를 깨닫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 이 비유를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모든 사람에게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루카 12,41)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는 질문을 되돌려 주십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루카 12,42). 이 질문은 바로 오늘 우리 각자에게 던져지는 질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의 집을 돌보는 ‘관리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관리인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주인이 늦게 오리라 생각하고, 동료들을 때리고 먹고 마시며 취해 놉니다. 주인의 신뢰를 배신하고, 맡겨진 책임을 방탕과 폭력으로 채우는 어리석은 ...

[묵상] 2025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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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총의 허리띠를 매고 깨어 기다리는 행복 혹시 오랫동안 누군가를 기다려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군대에 간 아들을 기다리는 부모님의 마음, 멀리 떠난 연인을 기다리는 마음 혹은 중요한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마음. 그 기다림의 시간은 때로 길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우리가 기다리는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 기다림 속에는 설렘과 희망이 함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인의 삶이 바로 ‘깨어있는 기다림’의 자세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루카 12,35-36). 이 모습은 그냥 멍하니 앉아서 기다리는 모습이 아닙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언제든 즉시 일하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등불을 켜 놓는다’는 것은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주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주인을 향한 사랑과 신뢰가 없이는 불가능한, 능동적이고 희망에 찬 기다림의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아주 파격적인 모습으로 설명하십니다.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루카 12,37)라고 약속하십니다. 세상에 이런 주인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는 하늘나라의 질서가 세상의 논리와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주님께서는 상상할 수 없는 영광과 사랑으로 우리의 작은 충실함을 되갚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 이렇게 깨어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영적으로 잠이 듭니다. 세상의 걱정과 유혹이라는 어둠 속에서 신앙의 등불이 꺼져갈 때도 많습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쉽게 지치고 넘어지는 것일까요? 바로 이 질문에, 오늘 제1독서 로마서의 말씀이 심오한 답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