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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5년 11월 22일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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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누구의 하느님을 믿으십니까?  오늘 우리는 ‘음악의 수호성인’으로 알려진 성녀 체칠리아 동정 순교자를 기념합니다. 성녀에 대한 아름다운 전승이 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결혼식 날, 화려한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음속으로는 오직 하느님께만 "주님, 제 마음과 몸을 깨끗하게 지켜주소서" 라고 노래했다고 합니다. 그녀의 마음의 노래는, 오늘 복음과 독서가 극명하게 대비시키는 두 가지 삶의 방식, 곧 ‘죽음의 삶’과 ‘생명의 삶’ 사이에서, 우리가 어떤 노래를 불러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기에서, 우리는 ‘죽음의 삶’을 살았던 권력자, 안티오코스 임금의 비참한 최후를 봅니다. 그는 한평생 자신의 힘과 재산, 권력이라는 ‘세상의 음악’에 취해 살았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성전을 약탈하고 모독했으며(1마카 6,12 참조),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이들을 무참히 박해했습니다. 그는 이 땅의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어떠했습니까? 페르시아의 신전 약탈에 실패하고, 유다에서 자신의 군대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극심한 슬픔에 잠깁니다. 그리고 병상에 누워, 평생 처음으로 진실을 고백합니다. “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 없애 버리려고 군대를 보냈던 거야.  그 때문에 나에게 불행이 닥쳤음을 깨달았네.  이제 나는 큰 실망을 안고 이국땅에서 죽어 가네" (1마카 6,12-13). 그는 죽음 앞에서 절망합니다. 그가 평생 의지했던 돈, 권력, 군대가 자신을 구원해 주지 못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삶은 슬픔과 허무라는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는 철저히 죽은 이들의 신을 섬겼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살펴 봅시다. 예수님 앞에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을 믿는 또 다른 이들, 곧 사두가이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삶이란...

[묵상] 2025년 11월 8일 연중 제3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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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누구의 종입니까? 어제 우리는 ‘불의한 집사’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자신의 미래를 위해 주인의 빚 문서를 위조했던, 세상적으로는 참 ‘약삭빠른’ 집사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부정직함이 아니라, 닥쳐올 위기를 대비하는 그의 ‘치열함’과 ‘슬기로움’을 칭찬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핵심을 꿰뚫는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 질문은 바로 “당신은 무엇에 충실한 사람입니까?” ,  “당신은 누구를 주인으로 섬기고 있습니까?”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아주 작은 일에 성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성실하고,  아주 작은 일에 불의한 사람은 큰일에도 불의하다 ” (루카 16,10). 예수님의 논리는 명확합니다. 우리가 잠깐 있다 사라질 이 세상 재물을 다루는 데에도 충실하지 못하고 탐욕을 부린다면,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영원하고 참된 생명의 부요함을 맡기실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 어떠한 종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쪽은 미워하고 다른 쪽은 사랑하며,  한쪽은 떠받들고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 (루카 16,13). 이 말씀을 듣고 있던 바리사이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었기에, 예수님을 비웃었습니다(루카 16,14 참조).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며 하느님을 섬기는 척했지만, 그들의 마음, 그들의 진짜 주인은 ‘재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 너희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 마음을 아신다.  사실 사람들에게 높이 평가되는 것이 하느님 앞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이다 ” (루카 16,15). 우리는 바리사이들의 모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우리 역시 하느님과 재물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지는 않나요? 주일에는 하느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월요일...

[묵상] 2025년 11월 2일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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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우리는 조금은 무겁고, 또 그리운 마음으로 오늘 ‘위령의 날’을 맞이합니다. 우리의 기억은 먼저 세상을 떠난 부모, 형제, 자매, 배우자, 자녀, 친구들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품을 향해 떠난 모든 영혼을 향합니다. 그들의 빈자리가 주는 아픔과 슬픔은 여전히 우리 가슴 한편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 (마태 5,4) 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슬픔을 끌어안으시고, 그 안에서 참된 행복과 위로를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의 슬픔이 가장 깊어질 때, 우리는 오늘 제1독서의 욥과 만나게 됩니다. 욥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건강, 재산, 자녀들까지 모두 잃고, 잿더미 위에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고통은 죽음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절망의 잿더미 속에서, 욥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신앙의 외침 중 하나를 토해냅니다. "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 (욥 19,25-26). 이것은 그저 막연한 희망이 아닙니다. 이것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터져 나온 확신의 빛입니다. 욥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이 육신이 먼지로 돌아간 뒤에도 ‘살아계신 구원자’를 내 눈으로 직접 뵙게 될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난 이들을 오늘 우리가 기억하며 품어야 할 희망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이토록 담대한 욥의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답을 줍니다. 우리의 희망은 우리의 감정이나 공로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 (로마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