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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5년 12월 10일 대림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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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게 와서 쉬어라 12월의 중순을 향해 가는 이 시점에 한 해를 마무리해야 한다는 압박감, 새해를 준비해야 하는 분주함 그리고 각자 짊어진 삶의 무게들로 인해 어깨가 무겁지는 않으십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너무나 잘 아신다는 듯, 가장 듣고 싶었던 따뜻한 초대를 건네십니다. "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마태 11,28). 세상은 우리에게 “더 열심히 해라”, “더 빨리 달려라”, “더 많이 성취해라” 라고 채찍질합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쳐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멈추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더 일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오너라” 라고 하십니다. 해결책은 더 많은 노력이 아니라, 주님 품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안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뜻밖의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마태 11,29). 지금 힘들어 죽겠는데 멍에를 또 메라니요? 멍에는 소가 밭을 갈 때 어깨에 얹는 무거운 나무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 정녕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마태 11,30)고 하십니다. 도대체 주님의 멍에가 무엇이기에 가볍다는 것일까요? 유다인들에게 멍에는 ‘율법’을 상징했습니다. 그들은 수많은 규칙과 의무라는 멍에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주시는 멍에는 바로 ‘사랑’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비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멍에를 씌워놓고 뒤에서 구경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멍에의 한쪽 끝을 당신께서 먼저 메고 계신다는 사실 입니다. 주님과 함께 메는 멍에, 그분과 나란히 걷는 멍에이기에 그것은 무겁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기쁨이듯이, 주님과 함께하는 십자가는 더 이상 형벌이 아니라, 구원의 도구가 ...

[묵상] 2025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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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사랑의 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어쩌면 우리가 들었던 그 어떤 말씀보다도 가장 어렵고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6). 사랑을 가르치러 오신 분이 어떻게 ‘미워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합니다. “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7). 그리고는 가진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까지 하십니다(루카 14,33 참조). 이 말씀은 마치 우리 앞에 거대한 성벽을 세우고 “이것을 넘지 못하면 너는 나를 따를 자격이 없어”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요구 앞에서 ‘저는 도저히 저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며 좌절하고 포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토록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를 하시는 걸까요? 정말 우리에게 가족을 미워하고, 고행을 하며, 무소유로 살라고만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두 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과 ‘전쟁에 나가는 임금’의 비유입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계산’을 한다는 것입니다. 탑을 세우기 전에 내가 가진 돈으로 완성할 수 있는지 비용을 계산하고(루카 14,28 참조), 전쟁에 나가기 전에 나의 군사력으로 이길 수 있는지 전력을 계산합니다(루카 14,31 참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너의 삶을 건 중대한 결단이다. 그러니 그 ‘대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계산해 보아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가’는 바로 ‘우선 순위의 완전한 변화’입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1순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가족, 재산, 심지어 나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느님보...

[묵상] 2025년 11월 4일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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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핑계를 거절한 종, 사랑으로 가득 찬 집 오늘 복음은 하늘나라에서 벌어지는 큰 잔치에 대한 비유로 시작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풍성한 행복의 식탁으로 초대하십니다. 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러운 초대입니까! 그런데 놀랍게도, 맨 처음 초대받은 사람들은 모두 거절합니다. 한 사람은 “밭을 샀는데” (루카 14,18) 가봐야 한다고 합니다. 내 사업, 내 재산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루카 14,19) 그것들을 부려봐야 한다고 합니다. 내 일, 내 소유물이 더 급하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으니” (루카 14,20) 갈 수 없다고 합니다. 내 개인적인 삶, 내 관계가 하느님보다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2천 년 전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매일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지 못하는 바로 우리 자신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주님, 오늘은 바빠서 기도를 못하겠습니다’ , ‘주님, 지금은 돈 버는 게 더 중요해서 주일을 지키기 어렵습니다’ , ‘주님, 제 가족 문제, 제 즐거움이 더 우선입니다’ . 우리는 저마다의 ‘밭’과 ‘겨릿소’와 ‘가정사’를 핑계로,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가장 큰 기쁨의 잔치를 놓치고 맙니다. 주인은 이 거절에 분노합니다. 그러나 잔치를 취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종에게 명령합니다. “ 어서 고을의 한길과 골목으로 나가 가난한 이들과 장애인들과  눈먼 이들과 다리저는 이들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 (루카 14,21). 그리고 자리가 다 차지 않자, 다시 말씀하십니다. “ 큰길과 울타리 쪽으로 나가 어떻게 해서라도 사람들을 들어오게 하여,  내 집이 가득 차게 하여라 ” (루카 14,23). 하느님의 집은 텅 비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은 너무나도 커서, 스스로 자격 있다 여기는 이들이 거절할 때, 오히려 세상의 눈으로는 자격 없어 보이는 이들, 소외되고 상처받은 이들을 향해 더욱 활짝 열립니다. 바로 이 ‘주인의 명령’을 온 ...

[묵상] 2025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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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갚을 수 없는 이에게 베푸는 것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거래를 합니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이만큼 돌려받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니, 그 사람도 나에게 친절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생일 선물을 챙겨주었으니, 내 생일도 챙겨주기를 은근히 기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이며,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이고 당연한 상식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으십니다.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루카 14,12). 친구도, 형제도, 친척도 부르지 말라면, 그럼 누구를 초대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루카 14,13).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4).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하늘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주고받는 거래’라면, 하늘의 방식은 ‘보답 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한 일이 이 땅에서 잊혀지게 하라. 그러면 하늘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참된 보상은, 이 땅의 사람들이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루카 14,14) 하느님께서 친히 갚아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감히 이처럼 손해 보는 것 같은 삶,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이 인간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이 질문에, 오늘 로마서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