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벨이 전쟁인 게시물 표시

[묵상] 2026년 1월 15일 연중 제1주간 목요일

이미지
  도구 vs 내어맡김 오늘 전례는 우리가 하느님을 대하는 두 가지 상반된 태도 를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줍니다. 한쪽은 하느님을 이용하려다 멸망하고, 다른 한쪽은 하느님께 온전히 맡겨 구원을 얻습니다. 첫째, 제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느님을 ‘도구’로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은 필리스티아인들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자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하고 반성하는 대신, 엉뚱한 해결책을 내놓습니다. “실로에서 주님의 계약 궤를 모셔 옵시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에 오시어 원수들의 손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게 합시다” (1사무 4,3). 그들은 ‘계약의 궤’만 있으면 무조건 이길 것이라고 착각했습니다. 마치 하느님을 도깨비 방망이나 부적처럼 취급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승리뿐이었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진정한 회개나 믿음이 없었고, 오직 성물을 이용해 하느님을 조종하려는 얄팍한 계산만 있었습니다.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계약 궤는 빼앗겼고, 3만 명의 군사가 전사했으며, 사제들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느님은 결코 인간의 욕망에 이용당하시는 분이 아님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둘째, 복음 속의 나병 환자는 하느님의 뜻에 맡겼습니다. 나병 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병을 고치고 싶은 절박함이 누구보다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고쳐 주십시오!” 하고 떼를 쓰거나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스승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마르 1,40).  “하고자 하시면” , 이 짧은 말 속에 참된 신앙의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은 100% 믿었지만, 그 결과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처분에 맡겼습니다. 나의 원의보다 주님의 뜻을 앞세운 것입니다. 자신을 도구로 이용하려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침묵하셨던 하느님께서, 당신께 모든 것을 맡긴 나병 환자에게는 즉시 응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에게 손을 대...

[묵상] 2025년 11월 5일 연중 제31주간 수요일

이미지
  참된 사랑의 대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우리에게, 어쩌면 우리가 들었던 그 어떤 말씀보다도 가장 어렵고 충격적인 요구를 하십니다. “ 누구든지 나에게 오면서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6). 사랑을 가르치러 오신 분이 어떻게 ‘미워하라’고 말씀하실 수 있을까요? 이어서 하시는 말씀은 우리를 더욱 움츠러들게 합니다. “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내 뒤를 따라오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 (루카 14,27). 그리고는 가진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까지 하십니다(루카 14,33 참조). 이 말씀은 마치 우리 앞에 거대한 성벽을 세우고 “이것을 넘지 못하면 너는 나를 따를 자격이 없어”라고 하시는 것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이 엄청난 요구 앞에서 ‘저는 도저히 저렇게 할 수 없습니다’라며 좌절하고 포기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왜 이토록 불가능해 보이는 요구를 하시는 걸까요? 정말 우리에게 가족을 미워하고, 고행을 하며, 무소유로 살라고만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두 가지 비유를 드십니다. ‘탑을 세우는 사람’과 ‘전쟁에 나가는 임금’의 비유입니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바로 ‘계산’을 한다는 것입니다. 탑을 세우기 전에 내가 가진 돈으로 완성할 수 있는지 비용을 계산하고(루카 14,28 참조), 전쟁에 나가기 전에 나의 군사력으로 이길 수 있는지 전력을 계산합니다(루카 14,31 참조).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은, 너의 삶을 건 중대한 결단이다. 그러니 그 ‘대가’가 무엇인지 정확히 계산해 보아라.”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대가’는 바로 ‘우선 순위의 완전한 변화’입니다. 그분은 우리 삶의 ‘1순위’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가족, 재산, 심지어 나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느님보...

[묵상] 2025년 10월 24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이미지
  내 안의 전쟁과 세상의 징표를 읽는 지혜 오늘 예수님께서는 아주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루카 12,54-56).  일기예보를 보고 우산을 챙기고, 바람의 냄새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는 것. 우리는 이런 세상의 징표를 읽는 데 익숙하고 지혜롭습니다. 주식 시장의 흐름을 분석하고, 건강 검진 수치를 보며 미래의 질병을 예측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로 그 똑똑함을 가지고 왜 영적인 현실에는 이토록 무지하냐고 우리를 꾸짖고 계십니다. 우리가 왜 이 시대의 징표, 곧 우리 삶 한가운데 현존하시며 우리를 구원으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손길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요? 왜 우리는 세상의 일에는 그토록 민감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영적인 일에는 이토록 둔감한 것일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 처절한 자기 고백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우리가 외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하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내면부터가 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외침은 바로 우리 모두의 외침입니다. “내 안에, 곧 내 육 안에 선이 자리 잡고 있지 않음을 나는 압니다. 나에게 원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 좋은 것을 하지는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로마 7,18-19). 얼마나 솔직하고 뼈아픈 고백입니까! 머리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다 압니다. ‘용서해야지’, ‘기도해야지’, ‘겸손해야지’, ‘나누어야지’. 우리는 선을 향한 열망을 분명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달려갈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내 안의 또 다른 법이 나를 사로잡아, 내가 원치 않는 죄의 종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