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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2025년 11월 11일 투르의 성 마르티노 주교 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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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종의 겸손, 갚을 수 없는 은총 오늘 우리는 교회의 위대한 성인 중 한 분인 투르의 성 마르티노를 기억합니다. 성인의 이름 앞에는 언제나 그의 가장 유명한 일화가 따라붙습니다. 로마의 군인이었던 그가 혹한의 추위에 떨고 있는 벌거벗은 걸인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성인이 가진 것이라고는 그가 입고 있던 군인의 망토뿐이었습니다. 그는 칼을 뽑아 망토를 둘로 잘라, 절반을 걸인에게 덮어주었습니다. 그날 밤, 마르티노는 꿈을 꿉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잘라준 반쪽짜리 망토를 입고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말씀하시는 꿈이었습니다. “ 아직 예비 신자인 내 종 마르티노가 이 옷을 나에게 입혀 주었다.” 이 감동적인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들은 복음 말씀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주 냉정하고, 섭섭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종이 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양을 치며 온종일 힘들게 일하고 돌아왔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어서 와 식탁에 앉아라” 하고 말하겠습니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 먹고 마셔라 ” (루카 17,7-8) 하고 말할 것입니다.  심지어 그 종이 주인의 명령대로 다 했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할 이유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우리에게 직접 적용하시며 결론을 내리십니다. "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루카 17,10). 이 말씀이 우리를 당황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봉사하고, 희생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일 끝에 우리가 들어야 할 말이 고작 “너는 쓸모없는 종이다” 라는 것이라면, 얼마나 힘이 빠지는 일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봉사와 희생이 하느님께 점수가 되고, 칭찬받...

[묵상] 2025년 11월 6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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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은 이의 가치, 되찾은 이의 기쁨 혹시 아주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다가 기적처럼 되찾은 경험이 있습니까? 지갑이나 휴대전화 혹은 소중한 반지를 잃어버렸을 때의 아찔함 그리고 그것을 다시 찾았을 때의 안도감과 기쁨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 ‘잃어버림과 되찾음’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시는지, 그분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절절하게 보여주십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모여드는, 아주 훈훈한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본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이 투덜거립니다. “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 ” (루카 15,2). 그들의 눈에, 죄인들은 ‘잃어버려도 되는’, 상종 못 할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의롭다고 여기며, 죄인들과 선을 긋고 그들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들을 향해 그리고 우리를 향해, 예수님께서 두 가지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잃은 양 한 마리’와 ‘잃은 은전 한 닢’의 비유입니다. 양 백 마리 중 한 마리를 잃은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놓아둔 채, 한 마리를 “찾아낼 때까지” 온 산을 헤맵니다. 이것은 세상의 계산법이 아닙니다. 99%의 이익을 버리고 1%의 손실을 찾아 나서는, 비합리적이고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목자에게는 잃어버린 한 마리가, 이미 안전하게 있는 아흔아홉 마리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들 전부보다 더 소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리 양을 찾았을 때, 그는 “기뻐하며 어깨에 메고” (루카 15,5) 돌아와 이웃과 잔치를 벌입니다. 은전 열 닢 중 한 닢을 잃은 부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동전 하나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온 집안을 쓸며 찾아낼 때까지 샅샅이 뒤집니다. 그리고 한 닢을 찾았을 때, 그녀 역시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루카 15,9) 하고 외칩니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주시는 메...

[묵상] 2025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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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갚을 수 없는 이에게 베푸는 것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거래를 합니다. 내가 이만큼 주었으니, 이만큼 돌려받기를 기대합니다. 내가 상대에게 친절을 베풀었으니, 그 사람도 나에게 친절하기를 바랍니다. 내가 생일 선물을 챙겨주었으니, 내 생일도 챙겨주기를 은근히 기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이며, 어쩌면 지극히 인간적이고 당연한 상식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어 엎으십니다. 당신을 초대한 바리사이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네가 점심이나 저녁 식사를 베풀 때,  네 친구나 형제나 친척이나 부유한 이웃을 부르지 마라.  그러면 그들도 다시 너를 초대하여  네가 보답을 받게 된다 ”(루카 14,12). 친구도, 형제도, 친척도 부르지 말라면, 그럼 누구를 초대하라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다리저는 이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루카 14,13).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 그들이 너에게 보답할 수 없기 때문에  너는 행복할 것이다.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네가 보답을 받을 것이다 ”(루카 14,14).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하늘의 방식’입니다. 세상의 방식이 ‘주고받는 거래’라면, 하늘의 방식은 ‘보답 없이 주는 선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네가 한 일이 이 땅에서 잊혀지게 하라. 그러면 하늘이 너를 기억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받아야 할 참된 보상은, 이 땅의 사람들이 갚아주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날 “의인들이 부활할 때에” (루카 14,14) 하느님께서 친히 갚아주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감히 이처럼 손해 보는 것 같은 삶, 보답을 바라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그것이 인간적으로 가능한 일일까요? 이 질문에, 오늘 로마서의 말씀이 답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